양양으로 내려오던 지난 일요일 초저녁에 영동고속도로에서 눈을 만났다. 함박눈. 나에게 올해 첫눈이었다. 대관령 구간에서는 내린다기보다는 퍼붓는 듯했다. 안전하게 집까지 갈 수 있을까 마음 졸이며 운전했다. 고속도로와 7번국도를 겨우 지나, 마을 진입로에 쌓인 눈이 차바퀴를 헛돌게 하기 전에 가까스로 집 마당까지 들어갔다.
돌아오자마자 살펴보니, 우리가 집을 비우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썽은 ‘작동중’이었다. 우리 없는 틈을 타서 작동하기 시작했으면 돌아오기 전에 끝내야 할 것 아닌가. 지하수 끌어올리는 모터펌프가 계속 돌고 있었다. 이게 며칠을 돌았을까. 모터가 공회전을 하면 할수록 그 결과는 누진세가 팍팍 적용된 엄청난 전기요금 고지서로 날아온다. 압력을 감지해서 자동으로 모터가 돌다 멈추는 이 기계의 자동성이란 그렇게 위태위태하다.
고장이나 오동작 때문에 위태한 것이 아니라 자동성 자체가 의심스럽다. 이 기계뿐만 아니라 모든 자동제어 장치가 그렇다. 자동성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갈수록 굳어진다. 자동이 수동보다 시간을 벌어준 적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자동 장치의 자동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수동 장치보다 더 많은 수동의 시간과 추가 비용이 든다. 게다가 시스템 의존성이 높아져서 시스템 유지보수까지 감당해야 한다.
어떤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자동성과 유연성의 네 가지 조합을 언급하는 블로그 포스트를 읽은 적이 있다. ‘고자동 고유연(高自動 高柔軟)’, ‘고자동 저유연(高自動 低柔軟)’, ‘저자동 고유연’, ‘저자동 저유연’. 이 네 가지 조합을 인간의 삶에 적용해본다. 문명(문화)과 자연의 바람직한 균형이란 기준에서 볼 때 어떤 조합이 우리 인간의 삶에 가장 적합할까.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현대인은 대체로 ‘고자동 저유연(高自動 低柔軟)’의 삶을 산다. 이 삶에는 실존의 유연성과 직접성이 희박하다. 다양한 매개체(상품)에 접속되어 몸과 마음이 자동으로 굴러가는 삶이다. ‘저자동 저유연’은 척박한 자연계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환경이다. ‘고자동 고유연’은 문명의 삶에서 가능할까? ‘고자동’과 ‘고유연’이 양립할 수 있을까. 양립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고자동 고유연’보다는 ‘저자동 고유연’을 선택하겠다. ‘저자동’이 주는 맨몸·맨손의 불편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그 대가로 ‘고유연’을 선물로 받는다. ‘고유연’의 삶에서는 내가 나의 주인이 된다. 실존의 표면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직접성의 삶이다.
네 시간 넘게 운전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지하수 모터펌프 제대로 작동하게끔 손보고 연탄불 세 구멍 전부 붙여 보일러 가동하고 교환해온 컴퓨터 메인보드 재조립하고 나니, 새벽 네 시가 넘었다. 눈은 펑펑 내리고 있었다. 쌓인 눈을 밟아본다. 신고 있는 장화가 푹 빠진다.
말썽은 집이 비기를 호시탐탐 노린다. 빈 집에 ‘자동(自動)’이란 멍청이를 파수꾼으로 세우지 말라. 그 놈은 말썽의 끄나풀이다. 그렇다면 말썽은 누구인가. 나의 주치의다. 나의 의사는 지킬박사이면서 하이드씨.
올블로그를 기웃거리다 ‘대한민국 녹색 블로거’를 찾는다는 배너가 눈에 뜨였다. 녹색 블로거라, 이 또 무슨 수작인가, 해서 배너를 눌러보았다. 응모 기간 안에 ‘녹색’과 관련된 내용을 담은 블로그 포스트를 트랙백으로 포스팅하면 선정해서 상품을 준단다. (‘녹색’이란 단어가 환경운동이나 생태주의 운동의 상징으로 오래 쓰이긴 했으나, 하늘로님의 지적대로, ‘초록색’이란 단어가 더 바람직하니 이 포스트에서는 앞으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녹색’을 쓸 경우만 빼놓고 ‘초록색’이란 단어를 쓰겠다. 초록색이란 단어가 왜 더 바람직한지 알고 싶은 분은 이곳을 가보시길 바란다.)
오로지 경제·개발·성장만이 숭배되고,(이런 토테미즘 때문에 ‘이명박’이란 개발독재시대의 전형적 샘플이 고작 30% 안팎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인간 존재(Being) 자체의 ‘소비’보다는 상품의 ‘생산’이, 대안적 삶의 ‘생산’보다는 상품(물건·서비스)의 ‘소비’가 인간을 전체주의적으로 지배하는, 한국의 천민자본주의 대중소비사회에서 ‘초록색’ 지향이란, 얼마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대중들의 관심에서 소외되고 있는가. 의식 있는 소수의 운동가·실천가들의 전유물이 되다시피한 것이 아닌가.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초록색 블로거를 찾는다는 일은 일단 취지만 보면 좋은 이벤트다. 특히, 요즘같이 불황에다 고유가 시대에 시의적절한 이벤트라 할 수 있겠다, 할 수 있을까? 호황에다 경제사정이 아주 좋을 때에도 이런 이벤트를 기획했을까?
어디에서 주최하는가 봤더니, 문화체육관광부다. 말하자면 관에서 하는 일회성·전시성 행사쯤 되겠다. 시류에 맞춰서 한번씩 해보는, 지속성 ·진정성의 근거가 희박한 ‘반짝 기획상품’에 해당하지 않을까. (나도 내 추측이 틀리기 바란다) ‘일상적 실천’이 아닌 모든 이벤트·행사 따위는 다 그렇다. 그럴 듯한 상품까지 ‘녹색’ 행사에 걸맞게 준비되어 있었다. 1등 상품은 고급 자전거란다. 자전거, 이 얼마나 ‘친환경적’ 기술의 산물인가. 좋다. 다 좋은데 심사기준에 이상한 것 한 가지가 있었다. ‘콘텐츠의 완성도 및 정보성(80%) + 포스팅 콘텐츠 수(20%)’
‘콘텐츠의 완성도와 정보성’을 비중 있게 고려한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포스팅 콘텐츠 수’는 ‘초록색’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상품 타기 위한 목적으로 블로그를 급조해서 포스팅한 경우는 걸러내겠다는 조치인가. 중요하지 않은 것에 퍽이나 치밀해보인다. ^^ 이 행사의 진정한 의도는 그저 녹색 ‘블로거’를 찾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초록색’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블로거를 찾겠다는 것인가.
블로거이든 아니든, 대중에게 초록색 즉, 생태지향적 삶의 실천을 고취하고 정책반영의 통로로 기획된 행사로는 진정성이 의심스럽다. 특히 관에서 주도하는 행사는 더더욱 그렇다. 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박정희 정권부터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초록색 이념과 가치가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고려되고 정책에 반영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천성산 도룡농 사건과 새만금 갯벌 메우기를 보라. 핸드폰이나 수출하고 자동차나 수출해서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이 최고라는 식으로 산업화가 진행되어 왔고 지금도 한미 FTA를 비롯하여 여전히 그 모양이다. 오로지 개발과 성장, 한국의 역대 정권(파쇼정권이든 보수우파정권이든)에게 개발과 성장보다 앞서는 가치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 녹색 블로거’를 찾는다니, 지나가는 ‘미친소’가 웃겠다.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구간 터널(사갱) 공사장 입구 모습
새만금 간척 공사
‘환경과 성장’이 함께 간다고? 이런 이분법은 사실 기만적 타협책에 불과하다. ‘성장’의 개념 자체를 바꿔라. 진정한 ‘성장’은 사회체제가 먼저 생태적 공동체로 변혁되어야 하고, 그 기반 위에서 생태적 자연환경을 거스르지 않는 방식으로, 거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회복하는 방식으로 물질적 생산이 철저하게 생태적 가치에 의해서 통제될 때 이루어진다. 자본의 이익과 개발이라는 물신숭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미 산업사회의 도시적 삶이, 얼마나 반(反)환경적이고 반(反)생태적인지, ‘살림의 문화’가 아니라 ‘죽임의 문화’에 의해 끌려가는지를, 절실히 깨닫고 시골로 내려가 묵묵히 생태적 삶을 실천하면서 사는 이들이 소수이기는 하지만 꽤 있다. 그들은 목소리 높이지 않고 조용히 실천하면서 산다. 그런데 꼭 진정성이 의심스러운 어중이떠중이 집단이나 단체, 정부 기관에서 ‘친환경’이니 ‘녹색’이니 하면서 확성기를 잡고 돌아다닌다. 언제부터 그렇게 녹색이었나? 정말 ‘녹색’ 타령을 하려면 농업정책이나 근본적으로 생태지향적 농업구조가 되게끔 다 바꿔라.
초록색은 기술·공학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행사 주최측에서 제시하고 있는 포스트 내용의 예를 보니, 단지 예일 뿐이라고 하지만, 주로 환경공학적 아이템들만 나열되어 있다. 인식의 폭과 수준을 알 수 있다.
초록의 실천은 ‘친환경 기술·공학적인’ 영역이 핵심이 아니다. 기술공학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산업혁명 이래 전지구적으로 자연 생태계를 착취하고 파괴하고 교란시켜놓은 것이 바로 근대 자본주의 문명과 근대적 기술공학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과 삶 자체도 황폐해졌다. 오죽 했으면 1920년대에 벌써 엘리어트(T. S. Eliot, 1888 – 1965)는 장시(長詩) 〈황무지 The Waste Land〉에서 불모(不毛)의 ‘잔인한 4월’을 노래했겠나. 산업문명 속에서 생태적 유기성이 갈갈이 찢겨진 자연환경과 인간정신을 극복하기 위해서 초록색을 지향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사회의 생산양식, 인간의 사회적 관계, 즉 사회 전체가 생태지향적으로 재구조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근본 전제다. 그러기 위해서 생태주의적 사회혁명이 필요하다. 이 생태주의적 사회혁명에는 반드시 반(反)생태적 산업문명의 중핵인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대안을 포함한다. 이는 우리가 계속 모색하면서 실천해 나갈 장기과제이다.
현재와 같이 반생태적 사회 환경으로 겹겹이 포위된 상황에서 우리는 그럼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생태주의적 사회혁명만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가. 그 혁명은 어느날 개벽처럼 오지 않는다. 오늘 하루, 내일 하루의 일상적 실천으로 온다. 갈 길이 멀어 큰 걸음도 때로는 필요하지만, 일상의 소소한 실천을 걸음걸이로 하여 가야 한다. 그 걸음걸이에 당장 중요한 것은 일상에서 거리가 먼 친환경 기술·공학적 생산물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결국 자본의 또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풍력·조력·태양광 등을 이용한 기술을 개발한다거나, 에너지 절약형의 어떤 상품을 개발하여 상품화하는 것이 급한 것이 아니다. 물론 장기적으로 이런 기술·자원·대체 에너지의 연구·개발·발명도 필요하다. 그러나, 먼저 환경친화적·생태적 방식으로 사회체제와 생산양식이 재구성되는 것이 선조건이다. 그래야 그런 기술과 공학도 자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율적인 시민 공동체 영역에서 공익적 기술·자원으로 연구되고 개발된다.
대한민국 인구의 4분의 1이 서울에 살고 있다. 또 4분의 1이 수도권에 몰려 살고 있다. 서울과 수도권에 대한민국의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다. 나머지 절반의 반이 또 대략 지방 대도시에 살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남한 인구의 4분의 3 정도가 대도시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대도시의 일상생활 구조 자체가 지극히 반환경·반생태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서울·수도권 경우는 절반 이상이 아파트생활을 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아파트 생활은 철저하게 반환경적이고 반생태적이다. 초록의 환경과는 지극히 거리가 먼 공간구조이다. 이를테면, 똥 한번 싸거나 오줌 한번 싸면 변기 물을 내린다. 수도권에 몰려사는 거의 대다수의 가구에서 이렇게 엄청난 양의 물을 단지 배변을 위해서 낭비하고 있다. 이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자원이 얼마나 소모되고 자연생태계가 파괴 되고 있는 줄 아는가? 이렇듯 대도시의 삶의 구조는 한마디로 겹겹이 철저하게 반환경적으로 반생태적으로 구조화되어 있고 포위되어 있다. 사람들은 넘쳐나는 물건들의 홍수 속에서 쉽게 버리고 또 산다. 이 물건들의 생산과 소비 뒤에서 자연의 가공할 착취·파괴, 생태계 교란이 얼마나 심각하게 뒤따르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소비지향적 일상과 의식 속에서 초록색은 찾아 보기 힘들다. 애당초 산업문명 자체가 철저하게 환경파괴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환경·생태문제는 근본적인 수준으로 들어가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고 하여, 대도시에 사는 생각 있는 시민들이 일상에서 초록의 삶을 실천할 수 방법이 어렵고 힘든 것은 아니다. 이미 얘기한 바와 같이 소소한 일상적 실천만이 생태주의적 사회혁명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당장 다음 몇 가지만 날마다 실천하며 살아도 우리는 이라크를 침략해 초토화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부시를 조롱하고 비판할 자격을 얻게 된다. 부시가 이라크를 왜 침공했는지, 혹시 세계평화를 위해서 그랬다고 믿는 이가 있다면, 주입된 그 기만적 착각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길 바란다.
이것만 실천해도 초록 시민이 된다
1. 당장 이번 겨울부터 실내에다 여름을 재현하지 않는다.(물론, 그 반대상황도 마찬가지다. 여름에 겨울을 연출하지 말라.) 여름을 재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원과 에너지를 탕진하는지 더 이상 얘기할 필요는 없겠다. 실내온도 20도 이상 올리지 말고 지내라. 18도에서 20도 사이면 겨울철 실내외 온도 차이의 적정한 수준이다. 적정한 수준이란 신체의 건강에도 유익하다는 뜻이다. 실내에서 그 온도로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만 입고 지내려면 춥다. 내복을 입어야 할 것이다. 내복 입고 그 위에다 스웨터와 바지 하나씩 더 걸치고 실내생활을 하라. 이렇게 지내는 것이 겨울철의 운치이다. 나와 우리 아이들이 자는 방에는 입김까지 난다. 이렇게 지낸다고 아이들 얼어죽지 않는다. 아이들이 더 좋아한다, 답답하지 않다고. 이 얼마나 문학적 운치인가. 이런 생활 자체가 하나의 시(詩)다. 시집을 즐겨 읽는 것도 좋은 초록색 삶이지만, 한 발 더 나아가 아예 생활로 시를 써보라.
2. 설거지할 때 수돗물 틀어놓고 하지 않는다. 그릇 씻는데 그렇게 많은 물이 필요치 않다. 그 많은 물을 강에서 끌어내 소독하고 정화해서 수많은 가정까지 공급하는 데 또 얼마나 많은 자원과 에너지가 동원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개수대에다 물을 받아서 해라. 다 씻고 헹굴 때만 수돗꼭지를 튼다. 옛날에 우리 할머니세대들은 헹굴 때조차도 틀어놓지 않고 받아서 했다.
3. 현재 섭취하고 있는 육식의 양을 절반으로 줄인다. 아예 안 먹으면 더 좋겠지만 모든 이들에게 채식주의를 강요할 수는 없겠다. 사실 생태적으로는 채식주의가 인간의 몸에 더 맞다. 많은 현대병들이 과다한 육식의 섭취에서 온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지난 봄에 광화문에서 모여 안전한 고기 먹자고 촛불 시위를 했다. 작게는 국민을 기만하는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것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과도하게 고기만 먹는 식생활에 저항하는 1인 촛불시위를 각자 내면에서 해야 하지 않는가. 육식의 수요가 많으니 전세계적 수준에서 축산 자본에 의해 공급이 이루어진다. 수많은 양의 돼지, 닭, 소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반생태적으로 사육된다. 또한 그 가축의 사료가 엄청난 양의 농약으로 재배된다. 이것으로도 모자라서 소 사료에 소까지 갈아 섞어 먹이지 않는가.
특히 애완견을 키우는 이들, 가난한 나라의 굶는 아이들 몇 달치 식량 구입비보다 더 많은 비용을 들여가며 애완견을 금이야 옥이야 키우는 사람들, 당신들이 애완견을 사랑한다면, 장난감이 아니라 정말로 동물을 사랑한다면, 개고기만 증오하지 말고, 고기 자체를 먹지 마라. 애완견에 들일 비용 있으면 그냥 책이나 사서 봐라. 책 보기 싫으면 자선을 해라. 자선도 하기 싫으면 불에 태워라. 개는 자연스럽게 마당에서 전통적으로 키우는 것이 개에게나 사람에게 가장 좋다.
4. 승용차 모는 날을 지금의 절반으로 줄인다. 여기서 더욱 더 진보하려면 아예 카-프리(Car-Free, 차 없는 생활)를 실천한다. ‘카-프리’가 ‘21세기적 세련됨’이다. 요즘 사람들, 주위에서 보면, 도시나 시골이나, 정말 걷지 않는다. 걸어서 30분 이내의 거리도, 자기 차든 돈내고 타는 차이든 간에, 꼭 차 타고 다닌다. 그러면서 또 운동한다고 돈 쓰면서 헬스클럽 다닌다. 걷는 것보다 더 좋은 운동 없다. 조금 멀다 싶은 거리는 자전거를 이용한다. 출퇴근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너무 멀지 않다면 자전거 출·퇴근도 좋다.) 차를 끌더라도 될 수 있으면 카풀(Car-Full)을 실천하도록 한다. 대도시에만 주로 살면서 아직 차가 없다면, 승용차를 살 생각은 하지 말라. 대도시에서는 사실 승용차가 필요 없다. 교통 노선이 불편하고 차도 잘 안들어오는 시골 마을이라면 승용차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중교통과 교통체계가 정비된 대도시 내부에서 승용차들의 운행이 왜 그리 많은가. 승용차들의 도시요 보행자들의 지옥이 바로 한국의 도시이다. 그나마도 승용차의 운행이 과도하다 보니 교통정체가 극심해서 승용차들의 지옥이면서 동시에 보행자들의 지옥이다. 승용차 중독증처럼 천박한 것도 없다.
5. 소비지향적 유행문화를 거부하라. 이 소비문화는 자본가들의 식민지일 뿐이다. 유행 지났다고 쓰던 것 버리고 신상품 산다. 싫증나서 기분전환한다고 멀쩡한 것 버리고 새 것 산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기변’이다. 나는 처음에 ‘기변’이 무슨 말인가 했다. 핸드폰 기계 바꾸는 것이란다. 멀쩡한 핸드폰을 왜 그리 자주 바꾸나. 그렇게 자주 바꾸면 정신 건강에 이로운가.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임금노동의 시간을 바쳤는가? 핸드폰 바꾸기 위해서 일했다고? 돈 쓰는 재미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냐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뜻밖에도 많다. 핸드폰을 바꿀 게 아니라, 정신을 바꿔라. ‘말은 잘 못해도, 목소리는 이상해도, 남들 데모할 때 일만 열심히 했다는,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개신교 장로 이명박과 그 사람들의 정권이, 사람들 돈 덜 쓰게, 소비 덜 하게끔 만드는, 아주 훌륭한 정책을 지금 쓰고 있으니 상이라도 줘야 할 판이다.
나는 핸드폰을 재작년에서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동하면서까지 전화통화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끝까지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지만,(자본의 블루오션은 초록색을 실천하고자 하는 삶에는 대개 불필요한 오션이다.) 핸드폰이 없으면 신분증 없는 것처럼 취급받는데다가 사용할 상황도 있고 해서 사용하게 됐다. 기계도 가족이 옛날에 쓰다가 서랍에 쳐박아둔 7년된 흑백 핸드폰 쓰고 있다. 통화하는 데 아무 지장 없다. 핸드폰뿐만 아니라 가구며, 옷이며, 일일이 다 열거할 필요는 없겠다. 특히, 가구는 이사할 때마다 한번씩 버리고 새 것들 사는가 보다. 가구가 필요한 분들은, 대도시의 아파트 단지에 가보시라. 버려놓은 멀쩡한 가구들을 무료로 얻을 수 있다. 소비문화에 탐닉하면 할 수록 당신의 임금노동의 시간은 늘어날 것이며, 이익을 얻는 쪽은 자본가밖에 없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의 종류를 최소화하라. 경제사정이 좋건 안 좋건 간에, 물건 적게 사는 게 초록의 실천이다.
초록의 삶은 ‘진정한 이기성(利己性)’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초록(생태적) 지향성이 필요한 것은, 그것이 도덕적인 선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이기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사람들이 이기적이라서 문제라지만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들은 진정으로 이기적이지 않다. 그들은 자본의 식민지 백성, 즉 상품 구매·소비자가 되고자 할 때 더 많은 구매력(교환가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다툰다. 이 치열성은 그들 자신의 몸과 마음에 진정으로 ‘이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온전한 생태적 존재로서 자기와 자신의 삶을 이기하는 것이 아니다. 온전한 생태적 존재로서의 삶은 ‘자기’에게만 관심 갖는, 재화를 두고 다투지 않는 평화로운 삶이다. 자본에 의해 공급된 온갖 현혹물들에 몸과 마음을 학대하지 않는 그런 평안한 삶이다. 그런 삶은 인간 삶의 본래적 생태성을 회복하는 삶이다. 물건에게 자신의 집착과 욕망을 투사하여 남들과 그것의 차지를 두고 다투지 않는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초연한 무관심을 보이고 온전한 삶의 평정됨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머리털 한 올을 뽑아서 온 세상이 이로워진다 해도 뽑지 않겠다고 한 중국 고대의 사상가 양자(陽子)가 얘기하는 이기주의는 바로 이러한 진정한 이기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초록의 삶을 실천하려면, 몸과 마음을 온통 초록으로 물들이려면, 두 가지 삶의 원리와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들을 마음로 받아들이고 즐겨야 할 것이다. 뭐든지 도덕적 요구사항이나 강제사항으로 제시된다면 실천도 안 될뿐더러 그 자체가 외적인 억압이 될 수 있다. 자발적 실천만이 의미 있는 실천이다.
필요한 것은 직접 하라 (Do It Yourself)
초록의 삶을 실천하는 제일의 원리는 자급자족(Do It Yourself)이다. 자급자족은 고대의 원시경제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필요한 것은 스스로 만들어 쓰거나, 돈 주고 서비스 받지 말고, 직접하라는 말이다. 온전한 자연 생태계는 외부의 개입이나 관여 없이 자기 스스로 평형상태를 유지한다. 생태성란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의 일상도 그것을 모델로 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고도로 분업화된 산업사회에서 완전한 자급자족은 거의 불가능하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자급자족은 그런 완전한 자급자족이 아니다. 시장경제에 철저하게 의존되어 있는 일상의 삶에서 그 의존도를 최대한 낮추어보자는 것이다. 필요한 물건·서비스를 돈과 교환해서 얻을 생각을 하지 말고 직접 만들거나 직접 하는 것이 그 의존도를 낮추는 데 가장 비중이 크다. 교환하려면 교환가치 즉 돈을 벌어야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려면 극소수를 빼놓고는 대부분 임금노동을 해야할 것이다.
생계에서 임금노동 의존도를 낮추는 길은 자급할 수 있는 것들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 자급하기 위해 DIY한다고 또 재료를 돈 주고 구입한다면 말짱 헛것이다. 돈으로 구입하지 않고 재료를 공급할 아이디어를 연구하라. 그러나 한편으로, 오늘날 도시의 삶, 일상, 직업, 등 도시적 삶의 양상은 DIY하고는 정반대 방향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이 어려움을 돌파하려면 초록색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이 의지와 실천은 곧바로 즐거운 취미가 될 수도 있다. 일상의 작은 소품부터 시작해서 먹거리까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DIY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초록색의 시작이다. 이를테면, 진정 건강한 먹거리를 먹고자 한다면 당장 내년 봄부터 서울 근교에 주말농장을 하나 분양받아서 조그만 텃밭이라도 일구어보라. 직접 땀을 흘리며 가꾼 채소거리로 식탁을 차려라. 외식을 줄이고 직접 음식을 해먹어라. 유통되는 대부분의 즉석 식품들은 불구의 음식들이다. 초록의 실천은 즉석식품을 하나라도 덜 먹는 데에 있다.
즐거운 불편
초록의 삶을 실천하는 두번째 원리는 삶의 본래적 불편함을 즐기는 데에 있다. 산다는 것은 원래 불편하다. 외면적 삶뿐만 아니라 내면적 삶도 본래적으로 불편하다. 애초에 인간의 실존 자체가 불편한 것이다. 불편이 발명의 어머니가 아니라, 실존 자체가 원래 불편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실존적 불편을 상품으로 은폐하고 망각하게 한다. 상품을 사면 그 불편을 삭제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시장경제라는 식민지의 백성이 되면 될수록 인간은 주체적 실존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상품 소비자로서 살아가게 된다. 삶의 모든 국면이 상품을 매개로 하여 자동화된다. 자연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점점 삭제되어 간다. 이 불편을 기각하거나 삭제하려고 하지 말라. 시장경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실존적 불편은 삶의 축제가 될 수 있다. 삶의 본래적 불편함은 삶의 축제성의 다른 표현이다. 초록을 실천하는 삶은 실존적 불편함을 삭제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편을 삶의 축제성으로 받아들인다. 그럴 때 불편은 더 이상 불편이 아니게 된다. 19세기 영국의 사회주의자이자 디자이너·공예가인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는 말한다.
“일상생활에서 아주 작고 세밀한 부분까지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는 일, 마침내 그것을 예술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리게 될 때 그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이다.”
초록(생태적 삶)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일상생활의 ‘작고 세밀한 부분’을 보라. 그 부분들을 초록으로 바꿔보라. 그 노력을 즐겨라. 그러다보면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잔인한 4월’의 21세기적 일상에 그것은 ‘행복의 비결’이 될 것이다.
만일 배우자가 ‘불륜’을 저지렀을 때, 간통죄로 고소하고 공동 재산을 모조리 당신 차지로 가져오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앞으로 모든 청춘사업과 애정행각과 애인과의 정사를 국가에게 허락받고 하는 것이 좋겠다. 그 뿐만 아니라 결혼 자체도 국가에게 승낙받고 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결혼제도와 남녀간의 정사 자체도 법에 의거한 허락제로 바꿔야 한다고 캠페인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당신의 침실을 법률가들에게 개방하라. 이것을 비약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지 말라. 이것이 논리적 함의요 귀결이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감정과 개인 대 개인의 사적인 영역을 국가에게 위임함으로써 당신은 이제 스스로 자주적 개인의 기본적 권리을 포기하고 국가라는 공적 영역에 자신의 사적 실존을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옥소리 사건으로 이번에 네 번째로 제기된 간통죄 위헌 헌법소원이 헌법재판소에서 합헌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여론조사에서 70프로나 된다는 간통죄 처벌제도 존속 주장은 그 만큼 한국 사회가 위선적이고 이중적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정도로 한국 사회가 성적으로 폐쇄적이고 완고한 사회였던가? 이미 도덕적인 규범 따위는 씨도 안 먹히는 사회 분위기가 되었다. 배우자 몰래 애인 하나 두고 지내는 것이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넘쳐나는 전국 방방곡곡의 러브호텔들을 보라. 70프로의 간통죄 존속 주장은 이런 현실을 은폐하는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희망사항의 표현으로 보인다. 한편에서는 심리적 방지효과를 거론한다. 법적인 강제를 하게 되면 심리적 방지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규범과 법적 강제와 현실의 간극은 계속 벌어져 왔을 뿐이다. 이런 사회는 피곤하고 위험한 사회다.
간통이 가정을 파괴하니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배우자 한 쪽의 성적인 불성실로 파괴될 가정이라면 해체되는 것이 순리다. 법적인 강제로 유지되는 부부관계라면 해체하는 것이 맞다. 해체하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낫다. 도덕 규범이나 법적인 강제로 유지한다고 해서 가정 구성원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성적인 외도 때문에 빚어지는 부부간의 불화는 당사자들 상호간에 자발적 노력을 통하지 않고는 극복되지 않는다. 법적인 강제만으로 불화를 해소할 수 없다.
이미 간통죄의 법적 규제력이나 효력은 유명무실해 졌다. 간통죄라는 법제도는 애초에 가부장적 지배질서에서 제정된 것으로 보인다. 여성의 성적 일탈에 대한 통제는 여성에 대한 남성적 지배를 법제화한 것이 아니겠나. 산업화가 완료되면서 한국사회에서도 여성의 지위와 위상이 산업화 이전이나 초기보다 많이 향상되었다. 여성들도 ‘현모양처’라는 피학적(被虐的) 구속에서 벗어나서 당당한 욕망의 주체로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사회 분위기가 되었다. 과거와는 달리 이제 간통죄로 피소되는 측도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들도 늘어나고 있다. 간통죄 처벌의 발생 배경, 즉 남성중심적 기득권에서 보자면 아이러니컬한 현상이다.
간통죄에 대한 여성 내부의 입장도 이제는 양분된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폐지론을 주장하는 여성이나 단체들이 늘어나는 반면에 존속론을 주장하고 있는 여성들은 여전히 상당하다. 이런 여성 내부의 상반되는 입장은 간통제가 여성을 더 보호하는가, 아니면 남성의 기득권을 더 유지하는가에 대한 논쟁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논점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실증적으로 따져봐야 단지 부차적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간통죄 소송은 혼인관계를 해소하면서, 공동으로 이룩한 재산 빼앗아오기의 수단이 되고 있다. 아이들 양육권 문제는 또 이 수단의 수단이 되곤 한다. 약자 보호라는 본래의 명분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특히, 배우자 쌍방 간에 간통 소송이 제기됐을 때 이 문제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다. 애당초 이 사적인 영역인 남녀상열지사의 문제를 간통죄로써 통제하려는 기획 자체가 바로 물적인 토대, 즉 재산권의 문제와 연동되어 있다. 재산권이라는 물질적 소유 관계로 결혼과 가정이라는 비물질적인 관계를 규정하고 지배한다.
재산권의 영역과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事)의 영역은 분리되어야 한다. 재산은 재산 문제일 뿐이고 부부간의 인간적인 문제는 별개의 문제다. 두 가지를 완전히 분리해야 한다. 남녀상열지사의 영역은 국가가 감히 개입할 수 없는 사적 영역이다. 사적 영역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법적 제재는 완전히 철폐되어야 한다. 법적인 개입은 사적 영역이 아닌 부분, 이를테면 부부 공동 재산의 분배와 조정 문제라든가 부부간의 폭력 문제 등의 문제는 일반적인 약자 보호 차원에서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의 법률가 집단은 대표적인 권력엘리트 집단이다. 매우 보수적이고 권위적이며 가부장적이다. 국가주의적 사고가 강한 집단이다. 자본의 이익에는 사적인 권리를 철저하게 인정하면서, 물질적 이해관계가 아닌 부당한 공권력에 저항하는, 공권력에 독립적인 인간 본연의 기본적 권리에 대해서는 국가주의적으로 판단하는 집단이다. 이런 집단한테 국가보다 앞서는 자주적 개인들이 사적인 실존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를 들고나가 판결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치욕적인 일인가. 국가에 대한 노예임을 선언하는 행위다. 한국의 간통죄 제도는 시민들이 스스로 만든 자율적인 영역의 것이 아니다. 시민 사회의 영역에 대한 국가권력의 위계적 지배의 산물이다.
이제 간통죄로 소송 받는 것 자체를 거부할 때가 되었다. 부부들이여, 자존심 상하게 남녀상열지사 문제를 들고 법정에 나가지 말라. 당신들의 자존심 상대는 배우자가 아니라 국가권력과 법률가들이다. 그들 앞에 나아가서 사생활의 알몸을 다 보여줄 것인가. 그들 앞에서 성기를 삽입했느니 안 했느니를 따질 것인가. 재산문제가 중요한가? 사랑 문제를 돈으로 보상받으려는 참으로 치사한 짓 좀 그만 두라. 돈은 공평하게 나눠가져라. 아이들은 공동으로 책임져라. 그리고 자기의 갈 길을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