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test Publications

타인의 고통을 다루는 잡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다루는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판사, 경찰관, 의사 같은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습관이 되어 무뎌져서,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점차 자신의 의뢰인들을 형식적으로 대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들은 뒷마당에서 양이나 송아지를 잡으면서 튀는 피에 무감각한 잡부들하고 다르지 않다. 개인에 대한 비정하고 형식적인 태도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에게서 모든 권리를 빼앗고 징역형을 선고하는 데 판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시간뿐이다. 대수롭지 않은 형식주의의 준수를 위해 보내는 시간으로 판사는 봉급을 받고, 그러고 나면 모든 일은 끝나는 것이다.

〈6호 병동〉,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 체호프 소설선집》, 65쪽 ( 오종우 옮김, 열린책들, 2004 )

이른바 ‘싸우쓰코리아’의 ‘서울중앙지방법원’이라는 곳에 소속된 ‘형사합의27부’라는 ‘잡부’들이 오늘 (28일) 용산 철거민 농성자들에게 징역 5~6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국가의 법 질서 근간을 유린”했다는 “대수롭지 않은 형식주의의 준수를 위해” 유죄를 선고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권력에 알아서 긴 판결이지만, 이명박 정권과 용산 재개발로 이익을 얻을 자본에 노력봉사하지 않더라도, ‘형사합의27부’는 원초적으로 체호프가 말하는 ‘잡부’들이다.

판결 대상이 그들의 동료 즉, 권력-지배층의 구성원일 때, 이를테면 재벌 총수이거나 전·현직 국가 장치의 고위 관료이거나 여·야당의 실세 정치인들일 경우에, ‘잡부’들은 동료집단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성심성의껏 총력을 기울인다. 이건희 부자가 연루된 삼성 관련 비리 수사때 충분히 지켜보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해서 이 ‘잡부’들이 ‘흉악범’ 조두순에게 가벼운 형량을 선고했다고 해서 ‘잡부’이기를 그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이들은 ‘잡부’다.

이 ‘잡부’들에게 그들의 신분이 잡부임을 지적해주면 이른바 ‘법정모독죄’를 적용해서 이빨을 드러내며 공격해온다. 이 ‘잡부’들은 남한의 헌법이 제정된 1948년 이후 지금까지 권력의 ‘잡부’ 노릇을 해오고 있으나, 그들은 본원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다루는” ‘잡부’였다. 이들에게만 은혜롭게도 ‘잡부’라고 하니 저만치서 듣고 있는 ‘검찰’·‘경찰’·‘의사’·‘고급 공무원’ 따위들이 아우성을 친다, 불공평하다고. 그래, 공평하게 대해주마. 너희들 모두 ‘잡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단다. 이들 집단에서 ‘잡부’가 아닌 이는 극소수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다루는 업무에 종사하는” ‘잡부’ 즉, ‘파워 엘리트’가 되라고 이 나라 대다수의 학부모들은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12년간 자식들을 들들 볶아대면서 아이들의 몸과 마음에 난도질을 해댄다. 제도교육의 관료들과 사교육 장사꾼들은 거기에 빌붙어 눈깔을 희번덕거린다.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 전염병이 ‘신종 인플루엔자’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잡부’들이 물리력-폭력을 가지고 쥐고 흔드는 세상에서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는 방법은, 그들의 법과 권위를 뼛속에서부터 철저하게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 지배와 권위의 헤게모니를 내 영혼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과정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다루는 업무에 종사하는” ‘잡부’들이 고통당하는 이들의 진정한 ‘하인’으로 복무하는 세상을 만드는 첫걸음이 된다.

여자는 아프다

“사실 엄마는 건강해 본 적이 없거든요. 엄마는 여자잖아요. 니꼴라이 일리치 아저씨, 여자는 언제나 어딘가 아프죠.”

(<하찮은 것>, 안톤 체홉, 오종우 옮김)

여덟 살짜리 꼬마 알료샤가 엄마의 애인한테 하는 말이다. 여덟 살 나이에 벌써 ‘여자’의 본질 하나를 꿰뚫었다. 왜, 여자는 언제나 아플까? 어렸을 때부터 내가 만나거나 본 여자들은 한결같이 아팠다. 누이들도 그랬고, 이모들도 그랬고, 학교의 여선생들도 그랬다. 아주 어린 여자아이들만 아프지 않았을 뿐, 열두어 살 넘은 여자들은 죄다 아팠다. 그들이 아프지 않은, 몸과 마음이 쾌적한 날들은 드물었다. 청년이 되어서 만나거나 겪은 모든 여자들도 아팠다. 그들은 어제 아팠고 오늘 아프고 내일도 아팠다. 여자들은 아프기 위해서 태어난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결혼을 하고 보니, 아내도 아프다.

언젠가 어떤 여성 화가가 내게 말했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서 델리키트한 존재라고. 막심 고리끼가 안톤 체홉에게 보내는 편지에 당신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읽고나니 다른 사람의 작품은 모두 펜이 아닌 막대기로 쓴 것처럼 여겨진다고 썼다. 말하자면, 남자가 막대기로 쓴 글이라면 여자는 펜으로 쓴 글쯤 되는가.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보니(한 99년쯤 살았다), 여자들이 왜 늘 아픈 것인지 알 것도 같다. 그러나 여전히, 여자를 안다는 것은 난해한 일이다. 그것에 비하면 맑스의 <자본>,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두순의 <법계관문>, 러셀·화이트헤드의 <수학 원리>를 이해하는 일이 쉬울 것이다. 나는 왜 여자들이 언제나 그렇게 아픈지 모르겠다. 여자들이여, 그대들은 여자들이 왜 그리 늘 아픈 것인지 아는가?

오이디푸스의 고질병

매사에 지배하려 들지 마세요.
그대가 지배했던 것들도 평생토록 그대를 따르지는 않았어요.

( 오이디푸스왕 1524행, 천병희 옮김)

테바이의 궁전을 떠나는 오이디푸스에게 던지는 크레온의 충고. 정복하고 점령하고 지배하는 방식으로는 그 대상이 나에게 오지 않는다. 어거지로 온 것처럼 보이게 할 수는 있을는지 모르겠다. 돌이켜보라, 살아온 나날들을. 지배하려 했던 것이 한번이라도 그대를 순종했던 적이 있었는가. 지배하려고 했던 것 중에서 제대로 성취한 것이 얼마나 있었나. 사랑도, 지식도, 예술도, 사업의 성공도, 인생도, 인격의 만남, 모두 그렇다. 지배하려는 그것이 나를 따르게 하려면 ‘지배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정복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크레온, 넌 아니? 그것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