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March, 2008

잠언 16장 22절

문화로서의 사치는 ‘인간’과 ‘인간적 삶’의 디자인이자, 계속 갱신되는 발명이다. 조악한 디자인의 삶은 그 자체가 징역이요, 고도로 섬세한 디자인의 삶은 그 자체가 축복이 되겠다. 불행하게도, 그 디자인을 판별해주는 심판관을 어디에서도 만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좋은 디자인을 볼 줄 아는 안목에 이르렀다면, 그 안목 즉 섬세한 사유의 사치는 이미 그 사치 자체가 최상의 축복이다.
그리고,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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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움

교육은 그렇게 사람들이 서로서로 ‘받아먹는’ 게 많게끔 만든다. 공모의 기술이다. 매체환경의 최면술도 마찬가지다. 공모를 하게끔 하고 공범자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홀로움’을 위한 저항으로서의 교육은 무교육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이반 일리히에 가까이 간다. 교육은 그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의존성을 높여 간다. 그리하여 언제부턴가 이제 내가 나인 것이 아니라, 나는 내가 관계맺고 있는 타자의 시선이 규정하는 ‘지점’이 되어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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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내 새 집

 
유목과 은둔
 
의리(義理)가
낮은 샘가에 피묻은 채 머물고
온 허공에 수만 가지 꽃, 꽃들이
어지러이 피어
어찌 나갈까
저 먼 쓸쓸한 바다까지
가 마침내 내 두 아이를
만나 기어이
데리고 돌아올까
유목과 은둔의 집이여
오랜 내 새 집에.
( 김지하, 全文)
 
***
 
물론, 나의 <은둔과 유목>이, 김지하의 <유목과 은둔>에서 온 것은 아니다.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이 서로 상관없이 태어났듯이. 김지하는 유목을 앞에 놓았고 나는 유목을 뒤에 놓았다. 유목이 앞에 있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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