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썽은 빈 집을 호시탐탐 노린다
양양으로 내려오던 지난 일요일 초저녁에 영동고속도로에서 눈을 만났다. 함박눈. 나에게 올해 첫눈이었다. 대관령 구간에서는 내린다기보다는 퍼붓는 듯했다. 안전하게 집까지 갈 수 있을까 마음 졸이며 운전했다. 고속도로와 7번국도를 겨우 지나, 마을 진입로에 쌓인 눈이 차바퀴를 헛돌게 하기 전에 가까스로 집 마당까지 들어갔다.
돌아오자마자 살펴보니, 우리가 집을 비우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썽은 ‘작동중’이었다. 우리 없는 틈을 타서 작동하기 시작했으면 돌아오기 전에 끝내야 할 것 아닌가. 지하수 끌어올리는 모터펌프가 계속 돌고 있었다. 이게 며칠을 돌았을까. 모터가 공회전을 하면 할수록 그 결과는 누진세가 팍팍 적용된 엄청난 전기요금 고지서로 날아온다. 압력을 감지해서 자동으로 모터가 돌다 멈추는 이 기계의 자동성이란 그렇게 위태위태하다.
고장이나 오동작 때문에 위태한 것이 아니라 자동성 자체가 의심스럽다. 이 기계뿐만 아니라 모든 자동제어 장치가 그렇다. 자동성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갈수록 굳어진다. 자동이 수동보다 시간을 벌어준 적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자동 장치의 자동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수동 장치보다 더 많은 수동의 시간과 추가 비용이 든다. 게다가 시스템 의존성이 높아져서 시스템 유지보수까지 감당해야 한다.
어떤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자동성과 유연성의 네 가지 조합을 언급하는 블로그 포스트를 읽은 적이 있다. ‘고자동 고유연(高自動 高柔軟)’, ‘고자동 저유연(高自動 低柔軟)’, ‘저자동 고유연’, ‘저자동 저유연’. 이 네 가지 조합을 인간의 삶에 적용해본다. 문명(문화)과 자연의 바람직한 균형이란 기준에서 볼 때 어떤 조합이 우리 인간의 삶에 가장 적합할까.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현대인은 대체로 ‘고자동 저유연(高自動 低柔軟)’의 삶을 산다. 이 삶에는 실존의 유연성과 직접성이 희박하다. 다양한 매개체(상품)에 접속되어 몸과 마음이 자동으로 굴러가는 삶이다. ‘저자동 저유연’은 척박한 자연계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환경이다. ‘고자동 고유연’은 문명의 삶에서 가능할까? ‘고자동’과 ‘고유연’이 양립할 수 있을까. 양립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고자동 고유연’보다는 ‘저자동 고유연’을 선택하겠다. ‘저자동’이 주는 맨몸·맨손의 불편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그 대가로 ‘고유연’을 선물로 받는다. ‘고유연’의 삶에서는 내가 나의 주인이 된다. 실존의 표면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직접성의 삶이다.
네 시간 넘게 운전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지하수 모터펌프 제대로 작동하게끔 손보고 연탄불 세 구멍 전부 붙여 보일러 가동하고 교환해온 컴퓨터 메인보드 재조립하고 나니, 새벽 네 시가 넘었다. 눈은 펑펑 내리고 있었다. 쌓인 눈을 밟아본다. 신고 있는 장화가 푹 빠진다.
말썽은 집이 비기를 호시탐탐 노린다. 빈 집에 ‘자동(自動)’이란 멍청이를 파수꾼으로 세우지 말라. 그 놈은 말썽의 끄나풀이다. 그렇다면 말썽은 누구인가. 나의 주치의다. 나의 의사는 지킬박사이면서 하이드씨.
You can follow any responses to this entry through the RSS 2.0 feed. You can leave a response, or trackback from your own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