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땐 성적순이 좋다
October 7th, 2008며칠 전에 도서관에서 주는 상을 받았다. 속초에 있는 ‘속초평생정보관’이라는 곳에서 우수독서가족상을 주었다. 상품으로 5만원어치의 도서상품권과 부상으로 지공예 작품 하나를 받았다. 속초 시내에 살던 4년 전에 이미 한번 받았고 이번에 다시 순서가 돌아온 것이다. 대출이용률이 최고로 높아도 해마다 연속으로 상을 주지는 않는 모양이다. 한편, 같은 속초 시내에 있는 ‘속초도서관’에서는 한번도 상을 주지 않는다. 우수이용자 포상제도가 없는 것일까. (강원도는 도교육청에서 관할하는 도서관에 ‘속초평생정보관’이라는 이상한 명칭을 붙여놓았다. 이곳과는 별도로 시교육청에 속하는 ‘속초도서관’이 또 있는 것이다.)
양양 산골로 들어온 4년 전부터는 역시 속초-양양교육청에 속하는 양양도서관도 이용하고 있는데, 이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수독서가족상을 받은 바 있다. 그 이후로 또 준다는 소식이 없다. 양양도서관도 대출이용률이 아무리 높아도 같은 가족에게 해마다 상을 주지 않는 규정을 적용하는가 보다.
세 곳 도서관이 해마다 이용자 포상을 돌려가며 배분하지 않고 오직 대출이용률만 평가해서 상을 준다면, 내 생각으로는 우리 가족이 세 도서관에서 해마다 받았을 것이다. 상 타령을 늘어놓는다고 해서 상을 무척이나 밝히는 위인으로 나를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교육세는 다 내면서 교육청 서비스를 전혀 받지 못하는, ‘탈학교배움이’(unschooler) 우리 아이들에게 책을 선물할 수 있는 도서상품권이 생겨서 좋고, 밋밋하게 오늘이 어제 같고 또 내일이 오늘 같고, 외적 자극이나 특별함 없이 날마다 한결 같은 시골에서 살다보면, 그런 작은 해프닝과 이벤트에도 아이들과 함께 희희낙락한다.
물론, 나는 늘 한결 같은 단순한 일상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서울을 떠나, 목가적이고 조용하며 질박하고 단순한 삶이 언제나 천천히 게으름을 피우는 곳, 그런 곳을 찾아 이 산골까지 오지 않았겠나. 산업혁명 초기를 살았던 월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가 런던 시내에서 읊조린 탄식은, 산업화를 초고속 개발독재로 완수한 남한의 서울 시내에서 내가 느끼는 피곤함과 별반 다르지 않다.
Written in London, September, 1802
O Friend! I know not which way I must look
For comfort, being, as I am, opprest,
To think that now our life is only drest
For show; mean handy-work of craftsman, cook,
Or groom!—We must run glittering like a brook
In the open sunshine, or we are unblest:
The wealthiest man among us is the best:
No grandeur now in nature or in book
Delights us. Rapine, avarice, expense,
This is idolatry; and these we adore:
Plain living and high thinking are no more:
The homely beauty of the good old cause
Is gone; our peace, our fearful innocence,
And pure religion breathing household laws.
사실, 동해안으로 이사오면서 속초 같은 곳에 도서관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사와서도 1년이 지나서야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것도 두 군데나 있다니. 그러나 도서대여점보다 조금 나은 정도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실제로 가보니 조금 나은 정도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였다. 공공 도서관은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닌가. 장서규모는 형편없어도 간간이 볼 만한 신간들은 자주 들어오고 이제는 절판되어 헌책방에서도 구할 수 없는 요긴한 책들이 가끔 발견되는 행운이 있어서, 그 정도 범위 안에서 이용할 만했다. 내가 볼 책 대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아이들 책 빌리는 일이다. 아이들 그림책 ― 이제는 동화책 사주는 것을 전부 감당할 수 없으니 도서관이 감당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서구문학사에서 재현(모방)의 역사를 다룬 《미메시스: 서구문학에 나타난 실재의 표현 (Mimesis:The Representation of Reality in Western Literature)》은, 아우엘바흐(Erich Auerbach, 1892–1957)가 전쟁(2차대전)을 피해 작은 시골 도시에 머물면서 그곳 도서관에서 겨우 이용할 수 있는 문헌자료만으로 썼다고 한다. 다룰 수 있는 문헌자료가 매우 적다보니 자료에 의존하기보다는 고전 텍스트에 대한 깊이 읽기–꼼꼼히 읽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방향으로 저술을 완성했다고 한다. 《미메시스》라는 저작의 뛰어남은 바로 그 꼼꼼히 읽기의 수직적 깊이에 있다. 이것을 보면, 모든 경우에 대해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자료와 책이 없어서 연구를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상상력과 창조적 사유의 빈곤을 탓해야지, 자료의 빈곤을 탓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정보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대중매체나 인터넷의 텍스트에 대해서는 어차피 날(raw) 데이터와 정보만을 다루기 때문에 지식과 사유의 부재를 거론하지 않겠다. 그러나 인문학자들이 생산해내는 텍스트가 많은 자료와 정보를 다루고 취합하면서도 창조적 사유의 부재와 빈곤을 드러내는 경우를 허다하게 많이 본다. 자료와 정보를 취합하고 처리하는 데에는 능력들이 뛰어난 듯하다. 그러나 창조적 생각이 빈약하니, 그저 자료와 정보의 가공과 재가공이 있을 뿐이다. 새로운 차원의 지식생산이 빈곤할 수밖에 없다. 정말 이제는 데이터와 정보가 지식과 사유를 대체한 것일까.
아우엘바흐의 예에서 보면 자료의 제한이, 특히 문학 연구에서, 연구의 빈곤으로 귀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꼼꼼히 읽기와 깊이 읽기, 섬세한 사유와 해석으로 극복되었다. 다루어야 할 자료의 면적만 넓히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적정 범위 안에서 정교한 수직적 천착이 더 요구되고, 여기에 창발적인 사유가 필요하리라. 『논어』 「위정(爲政)」편에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은 공부하고 연구할 때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가르쳐준다. 이 구절의 핵심은 〈學〉과 〈思〉의 대조에 있다. 두 글자의 해석에 여러 의견이 있다. 나는, 〈學〉은 현실 데이터와 정보에 대한 객관적 지식습득으로 보고, 〈思〉는 객관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과 창조적 사유로 본다. 현실의 데이터나 정보를 배우고 익혀 지식습득에만 급급하고 정작 필요한 자기의 능동적 상상력과 창조적 사유가 빈곤하다면 그저 어리석을 뿐이고, 멋대로 상상하고 생각할 줄만 알았지, 객관적 데이터와 경험적 현실에 대한 조회를 통해서 이론과 사유를 재정립하지 못하면 위험한 지경에 이른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그렇다면, ‘웹 2.0’ 국면의 주요한 도구로서 블로그라는 미디어는 인터넷 환경 안에서 ‘하이퍼텍스트(hypertext)적인 사유’의 수단으로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