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Moor)인 친구

cover마르크스 평전스물한두 살때 소련의 프로그레스(Progress)에서 나온 영어판 전기 《칼 마르크스 전기 Ⅰ·Ⅱ》(김라합, 소나무, 1998)를 읽은 적이 있다. 업적의 서술과 찬양, 꼭 신약을 읽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시절 ‘교도’로서 ‘맑스교’의 교주 일대기를 읽은 셈이다. 세월이 흘러 소련과 동유럽의 ‘무늬만 사회주의’가 해체되었고, 남한 자본주의가 국제통화기금(IMF)의 지배 아래 놓인지도 몇 년이 지나,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프랜시스 윈(Francis Wheen)이 ‘인간’ 맑스의 초상화를 그린 《마르크스 평전 Karl Marx》(정영목, 푸른숲, 2001)을 읽었다. 그 때 나는 한 ‘동지’의 인생 이야기를 읽었다. 다시 또 몇 해가 지나 이 산골에 살면서 이번에는 얼마 전에 나온, 프랑스의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가 쓴 《마르크스 평전》(이효숙, 예담, 2006)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나는 이제 ‘친구’의 인생 이야기 종합편을 읽는다. 이것 말고도 ‘친구’에 관한 재미나고 애정어린 야담 《유령의 사랑》(손석춘, 들녘, 2003)을 읽은 바 있다.

자크 아탈리의 평전은 크게 세 가지를 날줄 씨줄로 엮어 놓았다. 맑스의 개인사를 따라가면서 각 시기의 대외적인 활동과 저작 활동, 여기에 당시의 시대상황을 적절하게 끼워 놓았다. 기본적으로 맑스의 지적·사회적 활동 전체에 대해서 우호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맑스 전기·평전의 역사는 맹목적 찬양, 악마에 대한 저주, 두 극단 사이의 절충, 이 세 가지 흐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자크 아탈리는 두 극단 사이의 어설픈 절충이 아니라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프랜시스 윈이 주로 인간적인 개인사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아탈리의 평전은 맑스의 인간적인 면모와 지적 성취, 시대적 상황을 균형 있게 서술하고 있다.

내가 놀라웠던 것은, 시기적으로 기복이 있긴 하지만, 극도의 궁핍 속에서도, 그 궁핍에서 비롯된 인간적인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 그렇게도 지속적으로 지적 탐구와 저술 활동을 줄기차게 유지해낼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자식을 잃은 슬픔 같은 인간적 고통으로, 연구와 저술에서 손을 놓은 적이 몇 번 짧게 있기는 했지만, 연구와 글쓰기는 초지일관으로 줄기차게 이어졌다. 이것은 아무나 못한다. 머리를 쪼아대는, 마음을 쪼아대는 고통거리에서도 오로지 자기 주제에 몰두할 수 있는, 그것도 늘 괴롭히는 궁핍을 해결해줄 수도 없는 주제에 그렇게 몰두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

그는 많은 연구 프로젝트를 벌여 놓았는데 거의 대부분을 정리해 완결짓지 못하였고, 적은 부분만 겨우 매듭지어 출판했다. 독일에서 출간되고 있는 100여권의 전집(MEW)에서 그의 생애에 출판된 것은 <자본 1권>과 몇 가지밖에 안 된다. 이렇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안정된 재산이나 고정된 수입이 없이 그냥 맨몸·맨손으로 가족과 함께 생계를 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생계 때문에 당대의 시사적 이슈에 관한 일간지의 기사와 논설을 쓰느라 시간을 상당히 뺏겼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그의 완벽주의 때문이었다. 그는 문헌과 자료를 찾아 읽고 분석하고 요약하고 발췌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쓰고 또 썼다. 그리고 고치고 또 고치고 한없이 고쳤다. 스스로 기획해서 쓰는 원고도 그러했고 출판사에 약속했던 원고도 끝없이 고쳤다. 탈고를 미루고 또 미루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고치는 바람에 저술 계획의 대부분을 끝내 완성치 못했다. 완성된 원고는 정말 극히 적었다. 탈고를 못하는 완벽주의를 이겨내는 일은 사실 글쓰기의 기초에 속하는 연습이다. ‘천하의’ 칼 맑스조차도 글쓰기의 기초에서 터득해야 하는 ‘완벽주의와 끝없는 싸움’에서 심리적 장애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은 놀랍지 않은가. 놀랍긴 뭐가 놀라운가. 세상사 다 그렇다. 대가들도 끝끝내 기초를 마스터하지 못한다. 뭐든지 제대로 하려면 결국은 완벽주의와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지 않겠는가.

맑스의 성질머리나 품성은 나랑 비슷한 면이 많은 것 같다. 그런 대목을 만나면 낄낄대며 읽는다. 어쩌면 책상물림들의 특유한 성품으로 공통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확신이 서지 않았을 때는, 충분히 공부해서 완전한 이해에 이르지 못했을 때는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의심스러운 모든 것에 대해서 회의한다. 지적인 양심과 엄격함에 충실하다. 이럴 때는 마음이 개방되어 있고 합리적 자세를 유지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나름대로의 깨달음에, 이해의 경지에 이르면 이제는 확고하고 결연하다. 흔들리지 않는다. 더 이상 의심과 회의는 없다. 유연함을 잃지 않다면 큰 문제가 없으나, 그런 확고함이 경직된다면 이제 독선까지 나아가게 된다. 고집까지 곁들인다. 대개 보면, 이런 사람들이 실제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이념(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에는 옳고 덜 중요한 것에 틀리는 경우가 많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맑스는, 문자 그대로 단칸방은 아니지만, 가장 궁핍하던 소호시절에는 거의 단칸방 같은 집에서 아이들과 복작대면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게 가능한가? 내 경험으로는 거의 가능하지 않다. Jenny von WestphalenJenny von Westphalen온 가족들이 극진히 배려해준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맑스는 그런 배려를 받았나 보다. 그런 배려가 없다면 사실 불가능하다. 그는 일상잡사에서는 물론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귀족 출신 아내 예니(Jenny von Westphalen)가 살림을 전혀 못했지만, 가정부 데무트(Helene Demuth)가 있었다. 데무트는, 손석춘의 소설에 따르면, 지적인 성장을 통해서 맑스의 동지이자 동반자가 되었다고 한다. 아내 예니도 역시 동지이며 동반자였다. 맑스와 예니는 평생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계속 이어지는 궁핍 속에서 기복이 있었다. 특히 예니가 친정(독일 고향에 잠시 체류)에 가 있어야 했을 때 데무트의 몸 속에 맑스의 씨앗이 뿌려진다. Helene DemuthHelene Demuth아이(아들)는 나중에 사생아로 태어난다. 예니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게 된다. 이 시기에 맑스 부부는 매우 불화한다. 데무트는 아이를 자기가 키울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어 다른 데다 맡겨 키운다. 맑스는 평생 한번도 자기와 데무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보지 않았다. 나쁜 놈이다. 바람 피운 것까지는 같은 남자로서 봐줄 수 있지만, 아이 한번 보지 않은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교도’로서, ‘동지’로서 읽었던 이전과는 달리, 나는 이제 ‘친구’로서 그의 평전을 보면서, 이 평전과 공정하게 쓰인 다른 여러 평전들이 들려주고 있는 것처럼, 여지껏 내가 알고 있는 것처럼, 칼 맑스가 평생 골몰했던 것이 정말 노동계급의 해방이었나, 하는 근본적인 회의감이 든다. 과연 노동계급의 해방이라는 필생의 문제의식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분석하고 연구했는가? 그리하여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 대한 전망을 모색한 것일까?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해서, 팜플렛과 저술을 쓰고 인터내셔널을 만들어 활동을 했던 것일까?

그러한 나의 회의를 두고 엉뚱한 오해는 하지 말라. 거의 인신공격과 저주에 지나지 않는 평전의 저자들이 지껄이듯 그런 불순한 의도를 추정하지는 말라. 그런 악의적인 평전들의 내용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회의한다고 해서 그의 가치와 성취를 전혀 훼손하지 않는다. 나의 회의는 그의 인생 전체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간단하게 그의 필생의 화두를 설명해 버릴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화두를 끝까지 자의식하면서 몰두했을까? 그 필생의 화두는 채우면 채울수록 비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평생 그의 마음 속에서 목적의식으로 집념으로 품어온 화두이지만, 그것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점점 투명해져 가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평전에서 읽혀지는 맑스도 이런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맑스는 예니가 죽은 뒤인 말년에 아프리카로 긴 여행을 떠난다. 우리가 흔히 보는 그의 사진에 나오는 긴 머리와 수염을 삭발해버린다.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았다. 세 딸의 죽음을 차례차례 겪고나서 숨을 거둔다.

“나는 거시적 세계보다 훨씬 흥미로운 미시적인 이 작은 세계, 가족 생활, 아이들 소리, 이 모든 것을 휴식이라고 부르네.” - 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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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Responses to “무어(Moor)인 친구”

  1. 에코 Says:

    나는 예니군.

  2. altcre Says:

    나는 맑스가 아닌데.

  3. 포펠 Says:

    안녕, 에코, 알트크레. 캬캬

  4. 에코 Says:

    포펠 캬캬, 되게 깜찍해요. ^^

  5. altcre Says:

    허스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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