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짐승 가죽
그가 살던 시대에도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저술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단 한 줄도 써놓지 않았다. 어떤 이가 그에게 왜 쓰지 않느냐고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한다.
“양피지에 무언가를 끄적거려봐야, 내가 쓴 것보다는 오히려 양피지 자체가 더 값이 나갈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서 같은 질문을 받는데, 이번에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내 생각을 죽은 짐승의 가죽에다 써놓고 싶지 않아. 차라리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고귀한 영혼에다 새기고 싶네.”
글이라는 수단으로 정신을 재현한다는 것은 왜곡이요 족쇄요 악이라는 생각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플라톤부터 루소를 거쳐서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글과 글자보다는, 목소리와 음성이 더 진리의 원본이다. 생각이 정신의 음성이나 목소리를 통해서 스스로에게 현전한다는 것은 굴절이나 지연 없이 즉각적인 투명성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문자언어는 그런 자기현전의 투명성을 지니지 못하고 목소리를 지연한다. 이러한 현전의 형이상학, 목소리-로고스 중심주의는 자크 데리다의 <오브 그라마톨로지>에서 자세하게 폭로되고 전복된다.
주체가 결국 사회적 관계의 유동적 다발에 지나지 않거나 그런 다발로 해소된다는 통찰은 서구의 구조주의이후 사상의 주테마이지만, 이미 오래전 대승불교 반야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런 통찰을 수용한다고 할 때 한 개인이 주체 속으로 침잠하여 내면을 고요하게 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의 실체적 정체성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 존재의 탈자적 개방성으로 들어가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데리다의 ‘문자학’이나 정신분석학의 주체이론에 연관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표현과 재현수단의 과잉 속에서 지극히 소란스러운 야단법석의 시장통 같은 세상에 있다는 것이다. 사람과 미디어는 끊임없이 입에 거품을 물고 지껄이고 떠벌이고 고함을 치고 아우성을 친다. 소음 과잉의 시대에 살며 다들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잃어버렸다. 이 또한 자본주의 물신사회의 귀결이다. 매체환경의 다변화는 더욱더 그런 분위기를 촉진한다. 이제는 매체가 없어서, 수단이 충분치 못해서 표현하지 못하거나 전달하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다. 죽은 짐승의 가죽도 모자라서, 나무 깎아 만든 종이도 모자라서, 강을 끊고 산을 깎아 댐 만들고 위험한 원자력발전소 만들어 생산해낸 전기, 그 전기적 신호의 흐름 - ‘디지털 가죽’을 만들어서 이제 소음과 소란의 시·공간 격리도 없애버렸다.
(물론 아직도 지구촌의 많은 지역에서, 또 특정한 정치적 상황에서 표현과 재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도 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마음 속에 내면을 진득하게 담고 있지 못한다. 지껄이지 않고 있으면 참을 수가 없나 보다. 누군가 들어주지 않으면 미치는가 보다. (지껄임의 해방성이 때로는 필요하기도 하지만) 입 다물고 마음의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서 고요하고 고독하게 침묵 속에 침잠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이 시대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네트워크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카운터네트워크(counternetwork)도 필요하다. 죽은 짐승 가죽에 무언가를 쓰고 싶지 않다는 소크라테스의 농담은 나에게 그렇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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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nd, 2008 at 8:21 am
그렇군요. 또한 그런 소음으로 거짓말을 일삼죠. 스스로도 속아 넘어가는. 저를 향한 말이예요.
April 2nd, 2008 at 3:50 pm
자기평정이 위태로울 때, 소음이 도움된다면 관대해도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