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내 새 집

 

유목과 은둔

 

의리(義理)가
낮은 샘가에 피묻은 채 머물고
온 허공에 수만 가지 꽃, 꽃들이
어지러이 피어
어찌 나갈까
저 먼 쓸쓸한 바다까지
가 마침내 내 두 아이를
만나 기어이
데리고 돌아올까
유목과 은둔의 집이여
오랜 내 새 집에.

( 김지하, 全文)

 

***

 

물론, 나의 <은둔과 유목>이, 김지하의 <유목과 은둔>에서 온 것은 아니다.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이 서로 상관없이 태어났듯이. 김지하는 유목을 앞에 놓았고 나는 유목을 뒤에 놓았다. 유목이 앞에 있으면 불안하다. 나에게는, 유목의 수평적 날렵함은 은둔의 수직적 깊이에서 온다. 그 깊이의 하강에서 비로소 유목의 수평적 날렵함이 나비처럼 탄생한다. 정신의 자취인가? 몸의 기록인가? ”오랜 내 새 집”에 처박혀 나는 낡아가고 야위어간다. 마침내 재가 되어 바람에 날려갈 것이다. 그것이 나의 ‘은둔과 유목’이다. ‘씌어지지 않을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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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Responses to “오랜 내 새 집”

  1. 에코 Says:

    까마귀 우짖는 복사나무
    그 아래 잠든 늙은 여자를 본다면
    그 여자 머리 위 복사꽃 하얗게 가리우면
    ‘잠든 그림자 가만히 열어 나비를 꺼내야 하리’

    쳐박혀 ->처박혀 :)

  2. altcre Says:

    ‘쳐’는 언제나 ‘처’로 고집을 피웁디다.

  3. 도강선사 Says:

    만일 은둔과 유목은 내면에 오랫동안 삮여진 것을 펼치는 것이라면, 유목과 운둔은 그동안 펼친 것을 감추는 것이라고 읽는다면, 님은 앞으로 글을 계속 발표할 계획이라는 다짐으로 보이고, 김지하는 그동안 쓴 글을 반성하는 것이라 보이는군요.^^

  4. altcre Says:

    두 ‘~면’으로 된 전제도, 그에 따른 해석도 그럴 듯합니다. 특히, 김지하의 반성, 그렇게도 읽을 수 있겠군요. : )

  5. altcre Says:

    지난 몇 주 동안, 내가 사용한 ‘자율적 신’이란 표현에 걸려, 도강님이 밤잠을 못이루고(^^) 계속 몰두하는 듯한데, 나로서는 도강님의 그러한 몰두가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또 도강님의 토론 태도가 냉정하지 못한 면이 있어, 지난 번 논쟁이후 노코멘트로 일관했습니다. 이제 다시 내가 정리해드릴테니 자율적 신은 잊고 평안하게 잠자리에 들기 바랍니다. 찬찬히 읽어보고 얘기해보세요.

    내가 맨처음 도강님 포스트에 단 댓글이 이렇습니다.

    애당초 경제학은 정치경제학이었지요. 즉 오이코노미케적 경제학이었지요.맑스의 <자본>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고전적인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과 극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전적 정치경제학 이래로 자본주의가 진행됨에 따라 주류경제학자들은 총체적 오이코노미케에서 크레마스티케를 분리하여 추상하는 쪽으로 발전시켜 왔지요, 말씀하신대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자율적 신을 숭배하기 시작한 거지요. 그래서 지식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입니다.

    여기서,

    주류경제학자들은 총체적 오이코노미케에서 크레마스티케를 분리하여 추상하는 쪽으로 발전시켜

    이 표현은 도강님 포스트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요약입니다.

    그래서 지식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입니다.

    이 표현은 또 별도의 주제이기 때문에 이 정리에서 논외로 하겠습니다. 미셸 푸코의 작업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이 주장이 그리 설득력 없지 않다는 데에, 도강님도 동의할 겁니다. 말하자면 ‘지식은 권력이다’라는 테제에 다 들어 있지요.

    자, 그럼 본격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자율적 신을 숭배하기 시작한 거지요.

    이 문장에 대해서 분석해 봅시다.

    내가 쓴 ‘자율적 신’은 서양어의 번역이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한국어 표현입니다. 강단 경제학자들이, 아무도 안 읽는, 자기네들끼리만 읽는 논문에서 쓰는 어떤 용어법(jargon)이나 용어체계를 전제하고 쓴 게 아닙니다.

    그 표현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나 주류경제학자, 우파 이데올로그들이 자본주의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을 요약한 말입니다. 내가 ‘인용’이란 말을 쓴 것은 정확히 어떤 문건에서 그 표현을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총괄적으로 그들의 생각을 인용에 가깝게 요약했다는 말입니다.

    아담 스미스의 고전적인 표현 ‘보이지 않는 손’이란 비유와 대등하게 나는 ‘자율적 신’이란 비유로 우파 이론가들의 자본주의 시장관을 요약했습니다. 만일 ‘자율적 신’이란 표현이 충분치 못하거나 모호하다면, 똑같은 수준으로 ‘보이지 않는 손’도 모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는 본질적으로 모호한 구석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을 시장을 규율하는 ‘보이는 손’이라고 해도 그 비유의 기본 취의에 변함이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이란 수식어 계열에 유사한 어구를 계속 치환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손’이란 단어도 같은 계열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자율적 손’이라고 해도 되고, ‘보이지 않는 신’이라고 해도 되고, ‘눈에 뻔히 보이는 신’이라고 해도 됩니다. ‘손’과 ‘신’의 앞에 있는 수식어는 동작성을 드러내고 있고, ‘손’과 ‘신’은 그 작동의 구조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철학의 표현을 써보면, 용(用)과 체(體)에 해당합니다. 이런 자의적 포용성이 넓은 이유는, 어차피 메타포가 될 수 있는 자격기준의 경계선이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경계선의 타당성을 보장해주는 심급기관 같은 것은 없습니다. 굳이 비슷한 것을 들라면 그런 표현을 읽을 때, 우리의 상상력이 하는 형상화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 유비적 형상화는 직관적으로 수행됩니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숙명적으로, 비유적이어서 그렇습니다. 형상화 능력의 차이는 단지 감각적 호소력의 차이에 상응할 뿐입니다.

    일단, ‘자율적 신’이란 기표의 성립가능성 여부는 차치하고,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대상이 우파 이론가들의 자유방임주의적 시장관이란 것은 도강님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동의하시죠?

    국가나 사회가 시장에 개입하지 않아도, 시장은 자기제어적이고 자기통제적이어서, 수요, 공급, 가격 등 자기 메커니즘에 의해서 작동한다는 것, 그러니 좌파가 주장하는 개입, 즉 국가나 사회가 개입하면 시장의 질서가 교란된다는 것, 시장은 오로지 자기자신의 게임의 법칙으로만 규율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시장은 최적의 평형상태를 이룰 수 있다는 것, 이런 내용들이 바로 ‘자율적 신’이란 기표로 지시하고 있는 기의입니다.

    도강님도 여기까지는 나의 의도를 대략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제 ‘자율적 신’이라는, 도강님이 계속 문제 삼고 있는 기표, 그 표현 그 자체에 주목해 봅시다.

    도강님은, 내가 우파의 관점을 요약한 ‘자율적 신’이란 표현의 성립불가능성을 계속 주장했습니다. 어원적으로도 맞지 않고, 특히 서양에서는 그런 용어법은 없다 하면서 말이지요.

    도강님이 자율주의적 맑시즘을 공부하고 한국에 소개했다 하는 얘기는 현재의 논의와 직접적인 관련이 전혀 없으니, 그런 이론적 활동에 대한 언급은 논외로 합시다. 그건 별도의 이야기입니다.

    추측하건대, 도강님은, ‘자율평론’쪽 사람들이 사용하는 ‘자율’ 즉 아우또노미아의 번역어로서 사용되는 자율과 내가 잠깐 사용한 ‘자율적 신’의 ‘자율’과 계속 관련시키면서 그 표현의 성립불가능성을 주장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네그리의 아우또노미아와 내가 기술적(descriptive)으로 표현한 ‘자율적 신’의 ‘자율’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단어나 표현이 여러 입장에 공통으로 쓰이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노장사상의 ‘도’와 불교의 ‘도’와 유가사상의 ‘도’가 다 다르듯이 말입니다.

    한국어 ‘자율’은 <외부적인 힘이나 규율에 통제받지 않고 자기 규율이나 자기 규칙으로, 스스로 제어하고 통제하는>, 이런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또한 서양의 헤브라이즘적 유일신론인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광범위하게 사용된, 그래서 이제 거의 한국어가 된 God의 번역어, ‘신’은 한 마디로 자족적으로 존재하는 완전성이며 ‘결핍의 부재’입니다. 유일신론과 인격신론에서 말하는 ‘신’은 모든 속성을 다 충족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아무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신은 이미 자율적입니다.

    따라서 ‘자율적 신’이란 표현은 그냥 ‘신’이란 단어의 동어반복입니다. 강조를 띤 동어반복이지요. 전지전능한 신도 그냥 ‘신’의 동어반복입니다.

    이미 지난번 긴 얘기에서 나열했듯이, ‘자율적 신’이란 한국어 표현의 등가적 표현은 앉은 자리에서도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들여다 보세요, 기억이 안 나면.

    우파들의 ‘자율적 신’은, 한마디로 바꿔 말하면, <자기통제적·자기제어적·자기충족적 작동 기제이자 실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시장을 그렇게 전제하고 이론을 구축한다는 말입니다. 이 표현 또한 그냥 일반적인 한국어 표현이지 외국어의 번역이 아닙니다. 당연히, 특정 학문, 이를테면 경제학의 용어법(terminology)이 아닙니다.

    도강님은 서양에서는 그런 단어 조합이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도 그렇게 집요하게 주장해서, 내가 사용한 표현, ‘자율적 신’을 <영어로 번역해서>, “autonomous god”으로 구글 검색을 해봤습니다. 여기서 앞뒤로 인용부호를 꼭 붙여야 합니다. 그래야 정확히 저런 표현이 들어가 있는 텍스트를 찾아내지요. 결과는 그런 용례는 무수히 많이 뜬다는 것이고, 그런 텍스트들이 속한 분야도 다양했습니다. 철학, 종교학, 신학 등등… 그러니까 ‘자율적 신’이란 표현이 그리 희한한, 독창적인(?) 표현은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 나만의 독창적인 표현은 아니군요. ^^

    독일어로도 번역해서 “autonome gott”로 구글링해봤습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도강님, 프랑스어 잘 하는 듯한데, 프랑스어로도 해보세요. 마찬가지입니다. 구글 검색할 때 더 정확한 검색을 하려면 언어를 해당 언어로 설정해야 합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설사 우리말 ‘자율적 신’을 여러 서양어로 번역해서 구글검색해본 결과, 그런 용례가 단 하나도 나오지 않더라도, 한국어 ‘자율적 신’이란 표현은 어떤 관념이나 대상을 메타포, 비유로 사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 비유대상이 자본주의 시장이건 다른 상황에서 다른 관념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이미 그런 용례가 많이 검색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자율적 신’ 말고도 우파들의 자유방임주의적 시장관을 표현·요약할 수 있는 대체 표현은 많습니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내가 여기서 분명히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자율적 신’이란 표현도 그저 그런 표현들 중의 하나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표현이 엄청나게 획기적인 표현도 아니고 뭐가 결정적으로 잘못된 표현도 아니란 것입니다. 자율주의적 맑시즘에서 이탈리아어 아우또노미아를 ‘자율’로 번역했다고 해서, 시장에 대한 우파들의 관점을 ‘자율적 신’이라고 표현 못할 것은 없습니다. 이미 그 ‘자율’은 다른 맥락에 의존한 개념, 즉 ‘기의’를 내포하고 있으니까요.

    그럼, 왜 같은 단어를 써서 혼동을 야기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를 제공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겠군요. 그런 문제제기는 솔직히 억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동서양 지성사 전체를 훑어보면 같은 단어가 여러 맥락으로 쓰이는 경우는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왜 오직 ‘자율’에만 그런 적용을 해야 하는 건가요? 상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표현될 뿐입니다. ‘자율’이란 단어가 서로 다른 맥락(context)에서 쓰이면서도 그 단어의 기의가 각각의 맥락에서 공통적으로 유효한 의미중심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한국어 ‘자율’의 의미대로 말이지요.

    도강님이, 어제던가 오늘이던가, 에코님의 블로그에 올린 댓글을 보니까, 어디서 그런 ‘자율적 신’이란 표현을 보았는지 소스를 대보라고 하면서 그러면 모든 논의는 정리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애당초 그런 문제설정으로 이야기가 시작된 게 아니었기에, 그런 소스 밝히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넌센스입니다. 논의의 잘못된 촛점이동이지요. 지금껏 설명한 모든 이유에서, 출전 찾기는 전혀 필요없는 일입니다.

    우파들이 시장을 자유방임으로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관점을 요약하는 한 작은 표현>에 도강님이 그렇게 집요하게 정정하려고 애쓰면서 밤잠을 못잘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정정할 필요까지 있을 만큼 그 표현이 그렇게 무슨 치명적 오류를 담고 있는 게 아닙니다. ^^

    우리는 그 관점에 반대하고 비판합니다. 나도 반대하고, 도강님도 반대하고, 생각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반대하고 비판합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시장은, 절대로, 자기충족적 실체, 국가나 사회가 전혀 손대지 말아야 하는, 최적의 평형상태의 실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의 그런 전제와 이론구성은 그들의 지적 기획이고 전략이라는 얘기도 이미 전에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지식은, 좌파의 것이든 우파의 것이든, 과학의 모습을 띠는 것 같지만 그 심층적인 수준에서는 정치이고, 한편으로는 지배계급의 알리바이입니다.

    ‘자율적’이란 단어와 이미 거의 한국어가 되다시피 한 ‘신’이란 단어는 그냥 평범하게 다른 어떤 단어와도 마찬가지로 조합해서, 누구나 쓸 수 있는 단어들입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섹시한 신’도 가능합니다. ^^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주류경제학자들이나 우파 사회과학자·이론가들이(그들 내부에서도 편차가 있겠습니다만) 자본주의 시장(경제)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하자면 ‘자율적 신’으로 숭배하거나 그것에 가깝게 숭배한다,라고 총괄적인 진술을 한다면, 이것은 요약적 결론이기 때문에, 진술하는 이의 스타일이 반영된 것이고, 도강선사님이 집요하게 제기하는 그런 문제는 없습니다.

    수사법에는 역설법도 있고 모순어법조차 있는 마당에, ‘자율적 신’이란 비유적인 표현은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비유적인 표현에서 기표들은 각 언어의 통사체계에 맞게 무한 조합이 가능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개념적 진술에서조차도 가능합니다. 비유적 표현은 편협한 특정 학문의 칸막이 안에 갇혀 있는 용어법(terminology)이 아닙니다.

    도강선사님은 경제학 터미놀러지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집단 내부에서는 엄밀히 구분해서 사용한다 하더라도), 또 자율주의적 맑시즘의 자율에 ‘자율적 신’을 바로 연결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맥락(context)에서 사용되는 표현들입니다.

    우리말 ‘자율’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autonomous’의 어원을 살펴봐도 희랍어 ‘autonomos’(independent)에서 나왔고, ‘autonomos’는 ‘autos’(self)와 ‘nomos’(law)의 결합입니다. 이 두 특성은 ‘신’이 구비한 속성이기도 합니다. 서양의 헤브라이즘적 전통에서, 신은 언제나 전지전능하고, 스스로 존재하며, 자기자신의 법칙대로, 자기의지대로, 존재합니다. 그러니, 우파 이론가들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시장’이라는 ‘경제적 실재(reality)’를 그 ‘신’으로 비유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란 표현과 등가적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네티켓입니다.
    처음 도강님 블로그에 가서 내가 동조적인 덕담 수준의 댓글 하나 달았는데, 그런 때는 일단 첫대면이니까 인사하는 정도에서 코멘트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이 대목에서 도강님은 네티켓 의식이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 더 오고가면서 치열한 논쟁도 할 수 있고 갑론을박도 할 수 있게 됩니다. 도강님이 에코님 블로그에 써놓은 어떤 댓글을 보니까, 자기 신상을 노출하지 않는 것은, 그냥 순수하게 ‘계급장 떼고’ 인간대인간으로 논쟁하고 싶어서라는 취지의 말이 있습디다. 도강님이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급장 떼겠다는’ 그런 자세를 일관되게 견지하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오프라인상으로, 어떤 위상에서, 어떤 일을, 어떤 지적 활동을 해왔고, 하고 있는데’, 하면서 권위를 부각하려는 유혹은 철저하게 떨쳐버리고요. 나는 어떤 권위도 덮어놓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일단 찔러보고 테스트해보고 확인해보고 판단합니다. 정말 ‘지성’인가, ‘지식 다발’에 그치나, ‘정보 뭉치’에 불과한가. 대략 70프로 정도가 정보 뭉치들이고, 25프로 정도가 지식 다발들입니다. 겨우 5프로 정도가 지성이죠.

    나는, 어떤 분야이든, 학문이든 기술이든 정치이든 간에, 이른바 전문가주의, 프로페셔널리즘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전문가주의, 프로페셔널리즘은 자본주의의 분업 사회의 소산입니다. 분업은 인간을 파편으로 만들었고 지식 또한 파편으로 만들었습니다. 프로페셔널리즘은 대안적 가치에 의해서 극복되어야 할 퇴행현상입니다. 그런 판국에 지식인들이 자기 칸막이의 권위를 누리고 있는 것은 분업이라는 자본주의적 가치에 공헌하는 일입니다. 지식이나 과학이 그리 분명하게 구획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칸막이들을 쳐놓고 자기 영역의 권위를 구축하려는 것은, 한 마디로 학자집단의 ‘자율적 신’입니다. ^^ 그 뿐만 아니라 이른바 전문가·전공자들이 오히려 비전공자나 비전문가들보다 더 문제의식이 없고 총체적 핵심과 요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잡다하고 번쇄한 디테일과 터미놀러지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것을 너무나 흔하게 봅니다. 그런 디테일이 왜 있어야 하는 건지 그것들의 존재가치가 무엇인지, 이런 것에 대한 성찰은 삭제되고 그냥 디테일의 매너리즘에 고착되어 있습니다. 물론 도강선사님이 꼭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니까, 비약은 하지 마시고. 하여간 이 얘기는 별도의 주제로 긴 이야기와 대화가 필요하겠으니, 이 정도로 하고요.

    자, 내 얘기는 일단 정리했습니다. 도강님 얘기를 해보세요.

  6. 도강선사 Says:

    지난학기 중간고사 경제학원론 시험문제가, 라는 문제였었습니다. 오픈 북 테스트 였었습니다. 에 점수비중을 포인트라는 말도 첨언하였지요.

    시험답안지를 읽다보니, 아담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메타포를 님처럼 ‘자율적인 신’이라고 구사하더군요. 이 학생들 대부분 B학점 조차 받기가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율적인 손은 보이는 손의 메타포로 스미스의 견해와 다른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이것에 집착하는 이유는 제 학문적 소신 뿐만 아니라 학생의 점수평가에 대한 책임문제 때문입니다. 프로패셔널리즘을 주장하는 것이라 말하든 학자의 고루함이라 말하든 상관없으나, 타자에게 영향을 주고 이것이 잠재되있다가 다시 학생의 사회생활에 영향을 미치게 만드는 행위, 개인의 정신적이든 나중에 성적평가에 따른 것이든 그것을 심판하고 집행한 행위에 대한 것과 관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서구에서 autunome(자율)이란 단어에 대한 기원은, 아우토미아라는 이탈리어의 기원은 헬레니즘전통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소규모 도시 국가간의 관계를 지칭하는 것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님이 말씀하신 영어 indepedant의 의미가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둘 사이의 관계가 각각 자기규범에 따라 만들어 지는 것으로서, 서로 대등하게 소통 및 교류하는 관계입니다. 제3자의 매개자를 설정하지 않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헬레니즘 전통에서 제 3의 관계란 곧 신의 관념이고 매개자 혹은 중재자로써의 역활을 가집니다. 마치 규피드의 화살처럼. 따라서 자율이란 단어의 기원은 관념의 부재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즉, 인간의지에 관련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상징은 제가 누누히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저는 자유방임(우파), 비자유방임(좌파)라는 이분법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국가와 시장 모두를 반대하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좌파이론의 대다수는 이 함정에 빠져있다는 생각입니다. 소위 개혁이라는 이름이 보수적일 수 있고 진보적일 수 있듯이. 어떤 개혁이냐, 개혁의 내용이 무엇이냐 라는 기의적 차원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님의 말씀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7. 도강선사 Says:

    앞의 글에서 시험문제의 내용과 채점기준은 사라졌군요 :)

  8. altcre Says:

    (이 댓글에서 입력할 때 꺽쇠 괄호 열고 닫기는, 키보드에 있는 그대로 하면 안 되고, &lt; (꺽쇠괄호열기) &gt; (꺽쇠괄호닫기) 이렇게 태그 대체 코드(html entities)를 써야해요. 꺽쇠괄호가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랭귀지(HTML)에서 특별한 의미라서. ‘시험문제의 내용과 채점기준’이 사라진 이유가 앞뒤에 꺽쇠괄호를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일 겁니다. 꺽쇠괄호도 방문객이 댓글 달 때 그냥 사용할 수 있게끔 세팅을 해놓아야 하는데, 그냥 내버려뒀더니, 그렇게 됐네요. 아울러 댓글 수정 기능도 넣어야 하는데… 나는 내가 사용하는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일체를 내가 직접 자급자족(Do It Yourself) 합니다. 이것도, 거창하게 말해서, 분업 시스템에 안주하고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자각적으로 저항하는, 대안적인, 전인(全人)을 지향하는 실천이지요. ^^)

     

    학생들 시험문제내용과 학생들이 쓴 답안과 채점기준의 문제는 내가 보기에, 도강님과 내가 논의한 현재의 문제와 연관성은 있지만 차원이 다른 듯합니다. 설사 학생들이 내가 사용한 것처럼 그런 유비를 썼다 하더라도 그 역시 내가 사용한 것처럼 동일한 맥락에서 썼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구요. 학생들이, 그 유비로 지시하고 있는 대상(시장)에 대한 이해를 정확히 하고 있나, 하는 점에 맞추어 측정을 하면 되겠지요. 또한 경제학 전공 학생들은 해당 학문의 터미놀러지 관습도 배워야 하니까 그런 관습을 익힐 필요도 있겠지만, 터미놀러지의 관습보다는 창의력 있는 이해(understanding)를 하고 있는지, 선생들은 그것에 더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경제학 전공하는 학생들의 위치, 그런 도제수업 과정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인문·사회과학적 교양과 언어 감각으로 기술하고 표현합니다. 도강님도 전공분야가 아닌 것에 대해서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 표현들은 기표들의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넓어도 우리는 항상 맥락적으로 대화하거나 독해하기 때문에 과도한 혼란성을 초래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유비가 감각적인 호소력이 있어서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대중에게도)의 상상력과 연상력에 퍼져 있는지도 모르겠지요. 그런 감각적인 호소력이 시장에 대한 혹세무민적 관념을 유포하는 데 영향력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영향관계를 고려한다 해도, 우파들의 생각을 요약한 ‘자율적 신’이란 비유법이 가능하지 않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이미 말한 대로, 보이지 않는 손처럼 또 다른 대체적 표현처럼 다 고만고만한 표현들에 불과할 뿐이지요.

    ‘자율’이 인간의지에 관련됐다고 추적해 보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비유적으로 쓰이는 ‘자율적 신’에서 ‘자율’이라는 신의 속성은 어차피, ‘신’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인간’ 자신을 모델링하여 주조된 이미지들입니다. 인간적 한계와 결핍이 제거된 인간 이미지가 인격신론에서 말하는 ‘신’입니다. 당연히 그 ‘신’에게는 자율성이 전제됩니다. 인간의 자율성은 자신의 이미지인 신에게 그대로 투사됩니다. 투사된 뒤부터는 이제, 한계를 갖는 의지의 가능성 영역인 인간적 자율이, 신의 완전성을 드러내는 한 표현으로 위상이 달라집니다. ‘자율적 신’이란 메타포는 그런 맥락에서 쓰였다고 보면 됩니다.

    시장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자율적 신’으로 요약했을 때의 핵심은, 그들이 시장 경제를 국가(independent reality)로부터, 사회(independent reality)로부터 독립된(autos, independent) 실재(reality)로 본다는 것이고, 외부적 간섭 없이 자기자신의 작동법칙(nomos)으로 동작하는 것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의 자기독립성과 제3자 즉 신의 매개 없는 상호관계를 표현하는 오토노머스(autonomous)의 어원적 기원을, 이제 한 사회적 전체에서 국가, 사회, 시장경제라는 세 가지 차원 각 영역의 자기독립성과 대등적 상호관계라는 발상으로 생각해본다면, ‘자율적 신’이란 표현은 얼마든지 우파들의 시장관을 표현하는 데에 쓰일 수 있습니다. 즉 시장은 국가와 사회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영역이란 의미가 그 표현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종속변수가 아니라 독립변수라는 얘기지요.

    그러나, 더 나아가서, 한국어 단어 ‘자율’로 어떤 대상(시장)을 표현하는 데 쓰면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까지 기원을 추적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추적해도, 윗단락에서 말한 취지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만, 폴리스들의 상호관계에까지 기원이 닿는 그런 배경을 깔고 한국어 단어 ‘자율’의 의미 영역을 귀속시킬 근거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한국어 단어 ‘자율’은 그냥 우리말 한자어원 단어입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해당하는 서구어의 번역으로 사용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율적 신’이란 표현을 그냥 처음부터 우리말로 썼습니다. 오토노머스(autonomous)의 번역어가 아니란 말이지요. 우리 말의 어떤 단어를, 필요한 맥락도 아닌데, 자꾸 해당하는 서구어의 어떤 배경에 연관시키면, 지식의 식민지나 정신의 식민지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식 담론의 모든 기준이 유럽과 그 기원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자율적 신’이라고 썼을 때 그건 그냥 한국어 표현입니다. ‘자율’에서 ‘율’자의 기원을 또 소급하면 고대 중국 하왕조나 상왕조에까지, 갑골문자에까지 기원을 추적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추적하면 오토노머스(autonomous)의 번역어로서의 의미와는 또다른 새로운 의미지평이 열립니다. 그 의미지평에 관한 얘기는, 한자의 문자학과 선진시대의 고고학까지 연관시킬 수 있습니다. 새로운 주제의 이야기겠지요. 요컨대 어원적 접근이 언제나 유효한 것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어원적 접근이 필요하고 유효하다면, 한국어 한자어원 단어 ‘자율’에 대한 어원적 접근은 고대 희랍어가 아니라 한자 문자학의 갑골문자학을 참조해야 할 겁니다. 과거 출생의 비밀이 성장한 현재의 인격을 필연적으로 결정한다고는 할 수 없겠죠.

    자유방임(우파), 비자유방임(좌파)라는 이분법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국가와 시장 모두를 반대하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좌파이론의 대다수는 이 함정에 빠져있다는 생각입니다.

    나도 그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나는 레닌주의적 모델의 구좌파에서도, 68 이후의 신좌파에서도 다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국가와 시장에서 왔다갔다하는 설정 자체를 폐기해야 합니다. 위의 긴 내 설명에 자유방임-우파, 비자유방임-좌파 이분법이 보였다면, 그건 얘기의 촛점을 자꾸 확대해서 장황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편의상 그렇게 했다고 보면 됩니다. 세상에 그런 간단명쾌한 두부자르기는 없습니다. 어제의 진보가 오늘의 반동이 될 수도 있거든요.

  9. 도강선사 Says:

    항상 논란이 생기는 기표의 문제가 아니라 기표를 지시하는 대상이 문제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애초에 제가 님에게 이의를 제기하였던 것은 이표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메타포를 어떻게 이해한 것이냐는 문제제기를 하였던 것이죠. 님처럼, 국가, 사회, 시장 등 각각의 범주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자율성을 만들기 위해,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메타포를 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미스의 이 메타포는 시장의 가격결정이 자연조화를 이룬다는 상징하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로 사용한 것이기에 그것으로 제한시켜 다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스미스에게 시장과 사회사이의 관계는 [도덕감정론]에서 sympathy, 즉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 이론화시킵니다. 그러므로 님처럼 쓰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취지와 맞지 않게되는 것입니다. 국가에 대한 것은 사실 경제학이 국가로부터 혹은 정치로부터 분리하여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대상범주에 포함되지도 않았습니다. 님처럼 각각의 카테고리를 나누고 상호적인 관계에 대한 문제는 그 당시에는 문제의식이 부재하였습니다. 오히려 정치학은 정치학대로 경제학은 경제학대로 각기 자신의 문제의식 범주 내에서 이론화를 시도했지,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그것의 관계를 살펴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학문분과에 대한 일반이론도 19말과 20세기 초 까지 만들어진 역사를 조금만이라고 감안한다면, 님처럼 말씀하시는 것이 그 당시의 학문적 성과를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 사회, 시장 각각의 범주를 역는 메타포로 이라고 쓰자 라는 과감한 주장은 상당히 도발적인 주장이지만, 그저 하나의 단순한 직관일 뿐입니다. 그것이 각각의 범주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논증해야만, 사회과학계에선 수용할 수 있는 주장이기에, 우선적으로 주장에 앞서 각각에 대해 연구하고, 어느정도 확신이 있어야 주장하는 것이 순서라 생각됩니다. 그래야만 책임있는 주장이 될 수 있겠죠.

    이 문제에 대해선 이만 종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님의 글쓰기 작업이 이문제와 관련된다면, 기꺼이 언제든지 즐겁게 토론해줄 수 있지만, 님이 문학을 하는 분인지라 토론에서 얻는 도움보단 그 폐단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님이 의 메타포로 어떤 다른 글을 준비중이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토론해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튼 넷상에서 감정이 오고 가기도 했지만, 만나서 반가웠었습니다. 그리고 제 스스로 논쟁할 때 주의해야할 몇가지교훈을 얻어 뜻 깊었습니다.

  10. altcre Says:

    스미스의 이 메타포는 시장의 가격결정이 자연조화를 이룬다는 상징하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로 사용한 것이기에 그것으로 제한시켜 다루어야 합니다.

    스미스와 그 시대의 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협소한 연구와 학습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그런 ‘제한’이 필요하겠지요.

    그렇지만, 이미 도강님 블로그에서 처음 논쟁할 때 내가 언급한 것처럼, 18세기후반부터 20세기초까지 인문·사회과학에서 진행되어온 근대적 과학주의의 패러다임이, 국부적인 한 영역인 경제학 담론에서는 어떻게 관철되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지식사회학적 관심으로 그런 요약적 표현을 적용한 것입니다. 더 넓은 맥락에서, 말하자면 줌아웃을 더 많이 해서 보는 시각입니다. 어떤 지식을 더 상위 수준의 맥락에서 위치시키고 조망해야 새롭고 창조적인 지식을 생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므로 님처럼 쓰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취지와 맞지 않게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스미스의 의도와 취지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그의 그런 기획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가, 그도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 속에서 구속될 수밖에 없는 인식론적 전제들의 체계, 즉 인식론적 패러다임에 대한 언급입니다.

    님처럼 각각의 카테고리를 나누고 상호적인 관계에 대한 문제는 그 당시에는 문제의식이 부재하였습니다.

    당연히 스미스나 그 시대의 경제학적 문제의식으로 스미스의 메타포에 접근한 것이 아닙니다. 내 언급에 깔린 발상은, 이를테면 지식 고고학적 접근과 유사하다고 보면 됩니다.

    자신의 학문분과에 대한 일반이론도 19말과 20세기 초 까지 만들어진 역사를 조금만이라고 감안한다면, 님처럼 말씀하시는 것이 그 당시의 학문적 성과를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나는 20세기 중후반까지의 인문·사회과학적 성취를 바탕으로 그런 조망을 해보는 것입니다. 니체의 근대적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 하이데거의 근대과학에 대한 통찰,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이론이라든가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까지도 이미 다 경험한 시점인 20세기 후반 이래의 관점이지요.

    오히려 정치학은 정치학대로 경제학은 경제학대로 각기 자신의 문제의식 범주 내에서 이론화를 시도했지,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그것의 관계를 살펴본 것이 아닙니다.

    그게 바로 문제인 겁니다. 각자 자기 칸막이 안에서 문제틀을 설정하고 이론화를 시도했지요. 근대 과학주의의 한계입니다. 그것이 근대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이복동생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근대 과학주의의 토대와 배경과 그 근본적인 함의를 통찰해낼 수 있었던 맑스, 니체, 하이데거, 푸코, 들뢰즈까지의 지적 성취를 다 통과하고 난 이후의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고, 내가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등가적으로 ‘자율적 신의 숭배’를 언급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왔습니다. 그저 좁게, 스미스의 그 메타포와 시장에 대한 관계만을 언급한 것이 아니죠.

    그리고 국가, 사회, 시장 각각의 범주를 역는 메타포로 이라고 쓰자 라는 과감한 주장은 상당히 도발적인 주장이지만, 그저 하나의 단순한 직관일 뿐입니다.

    내 주장이나 직관이 아니라, 근대 과학주의적 세계관의 한계에 대한 요약입니다. 거친 요약이라 좀더 정교한 다듬기 작업은 필요하겠죠. 근대적 과학주의의 요체는 한 마디로 연속적인 인간, 사회, 세계, 우주 전체를 해부하고 구획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런 해부와 구획이 방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체화한다는 겁니다.

    시장이 가격결정으로 최적의 평형상태나 자연조화를 이룬다는 발상 그 자체가 실체론적 사유에서 나온 겁니다. 근대적 과학주의에서 실체는, 인간적 관여 이전에 주어진 자율적 존재인 것이지요. 자율적 존재라 함은, 바로 근대적 사유의 심장인 자기동일성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한 실체론적 사유는 이미 서구에서도 니체 이후로, 하이데거, 프랑크푸르트학파,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에 의해서 철저하게 비판받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대안인 관계론적 사유가 바로 니체적 기획, 차이의 철학의 배경이고, 이미 동아시아 철학에서는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정리해보면, 아담 스미스가 시장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최적의 평형상태, 이상적인 조화상태에 이룬다고 표현한 것은 시장이라는 사회적 실재를 자율적인 영역, 곧 자율적인 신으로 숭배한다고 다르게 표현될 수 있고, 그러한 관점과 태도는 근대적 과학주의의 한 실례로, 근대적 인식주관이 인식대상을 자율적이고 객관적인 실체로서 전제한다는 패러다임에서 나온 겁니다. 이러한 근대적 인식론을 뛰어넘는 탈근대적 프로젝트는 니체를 비롯해서 어떻게 시작되고 들뢰즈까지 어떻게 기획되고 시도되었는가, 하는 개관은 도강님도 대략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님이 문학을 하는 분인지라 토론에서 얻는 도움보단 그 폐단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글쎄요, 집중한 촛점이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는 게, 오히려 같은 집중을 가지고 있는 사람끼리의 토론보다 더 생산적인 것 같은데요. 내 경험으로는 그렇습니다. 단, 자기의 집중을 유일한 접근으로 독단하지 않는 열린 자세가 필요합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보게 됐는데, 근래에 베스트셀러가 된, 인문학과 자기개발서를 융합해서 ‘퓨전자기개발서’라고 하는 <생각의 탄생>이란 책에도 보면 자세히 기술되어 있듯이, 인류 지성사의 걸출한 천재들은 다양한 접근과 발상을 넘나들면서 창의적 사유를 했거든요. 횡단이라고 하나요. 집중한 게 같은 사람들끼리의 토론은 어떨 때보면 꼭 마스터베이션하는 느낌을 줍니다. ^^

    도대체 미셸 푸코의 전공을 뭐라 할 수 있을까요. 지식사회학이나 사상사쯤으로 포착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의 지적 기획과 작업은 한 마디로 경계가 없어요. 들뢰즈의 전공이 철학사이지만, 역시 그의 전 저술활동은 경계나 칸막이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지식의 횡단이고 유목입니다.

    블로그에는 일기 조각이나 수필(miscellany) 같은 것들을 주로 올려 놓지만, 문학이 주된 관심사는 아닙니다. 나는 한번도 전공, 즉 칸막이 의식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내 관심사의 이력은 언제나 文·史·哲·藝 전체였고, 십여 년전부터는 일상적 삶의 실천까지도 추가했습니다. 기술에도 관심이 많아서 목공 같은 것에도 관심이 있고, 컴퓨터 소프트웨어 공학, 프로그래밍도 좀 알지요. 이미 말했다시피 내 블로그 사이트 전체를 내가 설치하고 유지보수하거든요. 그 다음에 조그만 텃밭농사도 하고, 원예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식용작물과 관상용식물을 융합한 정원 만들기가 현재의 화두입니다. 특히, 식물분류학이 재밌더군요. 식물분류학이란 담론 자체가 상당히 근대적 인식론의 소산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또 우리 아이들 탈학교 교육을 하다보니 탈학교이론사상사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학교 안 다니고 아이들 스스로 공부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근래에는 자연과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정말 재미없었는데, 이제 보니 자연과학도 재밌더군요. 그래서 수학사책도 보고, 리처드 파인만도 들여다 봅니다. 생태론과 생태주의 사상사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자율주의 운동에도 생태주의 운동과 접목할 게 있지요. 소로우를 비롯한 아나키즘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아나키즘을 내 메인으로 할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자뻑은 이만 ^^

  11. 무명인 Says:

    두분의 현란한 이야기를 지켜보다가 한번 원문을 찾아 봤습니다. 스미스의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라는 말이 등장하는 곳은 다음의 단 한대목입니다. 이 레토릭이 거기에서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를 보기로 하죠.

    But the annual revenue of every society is always precisely equal to the exchangeable value of the whole annual produce of its industry, or rather is precisely the same thing with that exchangeable value. As every individual, therefore, endeavours as much as he can both to employ his capital in the support of domestic industry, and so to direct that industry that its produce
    may be of the greatest value; every individual ecessarily labours to render the annual revenue of the society as great as he can. He generally, indeed, neither intends to promote the public interest, nor knows how much he is promoting it. By preferring the support of domestic to that of foreign industry, he intends only his own security; and by directing that industry in such a manner as its produce may be of the greatest value, he intends only his own gain, and he is in this, as in many other cases, led by an invisible hand to promote an end which was no part of his intention. Nor is it always the worse for the society that it was no part of it. By pursuing his own interest he frequently promotes that of the society more effectually than when he really intends to promote it. I have never known much good done by those who affected to trade for the public good. It is an affectation, indeed, not very common among merchants, and very few words need be employed in dissuading them from it.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연결해주는 것은 ‘사적이익을 추구하는 개인’과 ‘국가의 부’입니다. 두분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수요와 공급을 통해 시장을 조절하는게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이 아니라 시장 자체가 국가와 개인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국가는 중세처럼 충성심 많은 개인들에 의해 부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적 이익에 관심많은 탐욕스런 개인에 의해 발전되는 ‘의도’와 ‘결과’ 사이의 괴리를 이 보이지 않는 손이 매개한다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손이 과연 자율적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 스미스의 논지에 따르면 그렇게 쓸 수 있습니다. 국가와 개인으로 부터 독립적이라는 의미에서 입니다. 하지만 altcre님의 입장이 맞다는 것도 아니군요. 님도 보이지 않는 손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12. 무명인 Says:

    자신이 인용하는 원문도 읽지 않고 주장하는 용기야말로 모두를 허무로 이끄나니…..

  13. altcre Says:

    단도직입적으로 논의에 들어오셨으니, 나도 그렇게 대답하겠습니다. ^^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본래 쓰여진 문맥에서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냐,가 도강선사님과 내가 논쟁한 초점이 아닙니다.

    나는 그 메타포의 등가적 표현으로 ‘자율적 신’을 언급했습니다. 도강선사님은 그 표현에 대해서 ‘자율’의 서양어 번역인 오토노머스(autonomous)의 어원적 기원을 근거로 하여 잘못됐다고 주장을 했고, 나는 그것에 대해서 반론을 했습니다. 이것이 논쟁의 초점이죠. 즉, ‘자율적 신’이란 메타포가 가능하냐,와 ‘보이지 않는 손’이란 메타포와 등가적인 표현일 수 있느냐, 이 두 가지입니다.

    도강선사님과 내가 논의한 두 표현, ‘보이지 않는 손’과 ‘자율적 신’으로 지시하고 있는 대상이 고전파 경제학의 자유방임주의적 시장관이라는 데에는 동의가 있었다고 봅니다.

    논쟁의 고리가 된 메타포 ‘보이지 않는 손’은 말하자면 자유방임주의적 시장의 작동기제 전체에 대한 환유입니다. 스미스도 그 표현을 환유로 썼을 겁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시장이 외부적 개입과 통제가 없어도 자기제어적으로, 이를테면 가격결정으로, 통제되어 최적의 평형상태나 자연조화적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요약은 본래 문맥에서 쓰인 환유를 좀더 상위 수준으로 추상화해서 진술한 것입니다.

    무명인님이 수고스럽게도 원문까지 가져왔으니, 원문에서 파악해봅시다. 발췌한 원문에서 보면, 개별적 경제주체들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 부의 증진에 기여한다고 합니다. 어쭙잖게 기획하여 공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이익 추구들만이 온전히 교란 없이 구현될 때 사회의 부가 증진되고 성취된다는 말로 정리되는군요.

    ‘의도와 결과’의 역방향적 상호 성취는 어떤 작동기제로 수행되는 건가요? 그것이 가능하게끔 하는 것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환유로 표현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의 자기독립적이고 자기제어적인 작동기제 전체의 환유이고, 그것은 분명 가격결정을 축으로 해서 공급이나 수요를 제어하고 생산·분배·소비를 통제할 것이며 사회적 부의 최적한 평형상태, 자연조화를 이룩한다는 것이겠지요.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연결해주는 것은 ‘사적이익을 추구하는 개인’과 ‘국가의 부’입니다.

    내가 읽기에, ‘보이지 않는 손’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별 경제 주체를 서로 연결하는 것으로 보이는군요. 그리고 ‘국가의 부’가 아니라 사회적 부인데, 둘 간의 차이는 구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스미스가 말하는 사회적 부는 부르즈와 시민계급의 부입니다. 스미스나 고전파 경제학에서 국가의 역할이란 단지 야경국가, 즉 시장의 외부적 울타리일 뿐이거나 개별 경제 주체들의 ‘사적인 이익 추구가 온전하게 교란 없이 구현될’ 수 있도록 장외에서 지원해주는 것에 그치지요.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의 환유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은 결국 시장 자체입니다. 따라서,

    시장 자체가 국가와 개인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시장 자체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것은 맞는데, 국가와 개인을 연결한다고 할 수는 없겠죠. 사적 이익 추구의 주체들을 서로간에 연결하고 제어한다고 하겠습니다.

    두분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수요와 공급을 통해 시장을 조절하는게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이 아니라

    이러한 오해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조절한다는 얘기는 결국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 자체가 스스로를 규율한다는 얘기와 같은 말입니다. 나의 심장이 나를 살게끔 한다는 말은 내가 스스로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적 이익에 관심많은 탐욕스런 개인에 의해 발전되는 ‘의도’와 ‘결과’ 사이의 괴리를 이 보이지 않는 손이 매개한다는

    그 매개는 가격결정을 축으로 하여 공급과 수요를 조절하고 종국적으로 생산·분배·소비를 지배한다는 거겠죠. 물론 이런 국면도 시장의 작동기제 전체의 한 국면이겠습니다.

    정리하자면, 시장의 한 국부적인 환유인 ‘보이지 않는 손’을 상위수준으로 일반화-추상화하여 논쟁이 이루어졌다고 보면 됩니다. 원문에서 확인해봐도 본래적 취의에서 이탈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원문까지 확인할 정도로 엄격한 토론은 아니었으나, 기회를 제공한 무명인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단지 다른 특별한 인용은 아니었고, 널리 알려진 메타포이기에 그냥 간편하게 논의됐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소한 토론조차도 모조리 출전과 전거를 다 확인하면서 한다면야 토론의 지극한 행복이겠죠. ^^

    내가 시장에 대한 우파이론가들의 관점을 ‘자율적 신의 숭배’라고 요약한 것은, 시장에 대한 고전파 경제학 담론에 국한된 것은 아니고, 사실 더 넓은 맥락, 말하자면 지식사회학적 조망에서 나온 겁니다. 이미 위의 댓글에서 얘기한 바와 같습니다.

  14. 무명인 Says:

    1. 일단 philology에 충실합시다.

    he is in this, as in many other cases, led by an invisible
    hand to promote an end which was no part of his intention.

    개인(사적 이익 추구) - 보이지 않는 손(매개) - 국가의 부(의도하지 않은 결과)

    원문이 이 이외의 방법으로 읽힐 방법은 없습니다. 개별자와 보편자를 매개하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신의 의지라는 신학적 함축도 담겨진 메타퍼입니다.

    2. 당연 society는 사회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사회는 사실상 국가이기도 합니다. domestic과 foreign으로 나뉘는 산업구조는 사실상 스미스 시대에 국가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요. 이 책의 제목은 자체가 국부론 아닌가요. 바로 정치경제학의 시발입니다.

    3. 논의의 출발이 어딘지는 제가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논의의 과정만을 참조했습니다. 어쨌든 두분의 논의 대상에는 스미스의 메타포의 의미에 대한 정의가 속해있지 않나요?

  15. altcre Says:

    무명인님만큼이나 나도 원문에 충실합니다. ^^

    예, 그 대목, 이미 앞 댓글에서 요약한 대로, 개별주체들이 자기이익을 가장 충실하게 추구할 때, 그 결과로서 자기의 의도가 아닌 결과, 즉 사회적 부의 축적에 기여한다는 대목입니다. 사적 이익은 사적 이익대로 증진되는 동시에 사회적 부는 그것대로 증진된다는 말입니다. 그 동시적 관계를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이 매개하는데, 이 매개가 곧 자유방임주의적 시장의 작동원리인 것이지요.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그 매개가 가장 순수하게 작동하도록 내버려두자는 발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셔널리즘 시대는 대외적으로 가장 왕성하게 식민지를 수탈·경영하던 시대죠. 그 시대에 국가의 부는 사실상 시민계급의 부였어요. 그러면서 자본축적이 진행되어 갑니다. 현실적으로 시민계급의 부이고, 국가의 부라고 한 것은 단지 그들 부르즈와계급의 내셔널리즘이 내건 이념입니다. 그 간극이 당시 서유럽 민족주의의 본질이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하자면, <국부론>는 사실 책제목을 바꾸어야 합니다. 맑스도 이 말에 동의할 겁니다.

    논의의 출발은 이 논쟁 맨앞에 있는 나의 댓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스미스의 메타포에 대한 정의는 이미 전제되어 있었구요. 지금 무명인님이 제시한 원문에서 확인해봐도 그 메타포의 의미에서 이탈한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

  16. altcre Says:

    신학적 함축, 예, 좋은 지적입니다.

    즉 그들은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를 이미 실체화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익추구의 원자들이 모여서 함께 작동할 때의 기제 또한 인간의 의도나 관여 너머에 존재하는 실체라는 것입니다. 그런 실체들은 바로 세계를 현상 너머에서 규율하는 중세적 신이 근대적 과학주의라는 각색을 거쳐서 기계론적·인과론적 초월성으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17. 무명인 Says:

    모르겠군요…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 내부의 참여자들을 조절하여 시장 내의 균형을 이루는 힘이냐 아니면 개인과 국가를 매개하는 것으로서의 시장이냐에 따라서 무엇이 무엇으로부터 자율적이고 초월적인가에 대한 논의는 달라잘텐데요. 다 비슷한 말처럼 되어버리네요. 뭐 저는 이만 하겠습니다…

  18. altcre Says:

    핵심은 이것입니다. 고전파 경제학은 시장을 독립영역으로, 사회적 층위와 국가적 층위로부터 독립된 자기규율을 가진 층위로 다루고 싶어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시장의 작동 메커니즘도 내부 요소들에 의해서만 움직인다고 주장합니다. 외부 요소가 개입되면 시장이 할 수 있는 최선이 교란된다는 것입니다. 교란된다는 것은 결국 자본의 자기증식이 방해받는다는 말입니다. ^^

  19. 도강선사 Says:

    무영인님은 정확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님이 만든 오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 내부의 참여자들을 조절하여 시장 내의 균형을 이루는 힘을 자율적으로 읽는 것에서 나옵니다. 이는 초월적인 신으로써의 보이지 않는 신이죠.
    개인과 국가를 매개하는 것으로써의 시장, 그것을 상징하는 보이지 않는 신을 자율적으로 읽는 것에서 나옵니다. 이는 내재적 신으로써의 보이지 않는 신이죠.

    따라서 스미스의 원전의 인용은 ‘자율적인’것으로서의 ‘보이지 않는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으로서의 ‘보이지 않는 신’을 말하는 대목입니다.

    이러한 님의 혼동의 근원에는, 보이지 않는 손은 ‘자율적 신’이라 부당규정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오류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나와 알트크레의 논의의 맥은 서로 공유합니다. 다만 차이나는 것은 이를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사용하지 말 것인가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시용하지 말하는 이유가 무명인처럼의 혼동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나 알트크레님은 문학적으로 그것을 사용하려하였던 것이죠.

  20. altcre Says:

    무영인님은 정확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지적한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지시해야죠. 그렇게 얼렁뚱땅 얘기하지 말고. ^^

    자율적으로 읽는 것에서 나옵니다. 이는 초월적인 신으로써의 보이지 않는 신이죠.

    결국, 맨처음 얘기로 돌아간 것 아닙니까. ‘자율적인’이란 표현을 쓰면, 무조건 ‘초월적인 신’을 상정한 것이라고.

    스미스나 고전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초월적 신’ 맞습니다. 당연히 인간의 인식주관으로부터 초월하고 있는 신이니까 스스로에 대해서 ‘자율적’이겠지요. 이미 얘기한 바 있듯이 스미스와 리카르도를 비롯한 고전파 경제학은 니체가 뛰어넘으려고 한 ‘근대적 니힐리즘’의 자식입니다. 고전파 경제학의 자연과학 버전이 바로 뉴튼의 고전역학이거든요. 뉴튼도 물리적 현상 저편에 기계론적·인과론적 실체를 상정했지요. 그 실체는 바로 궁극적으로 서구 형이상학 전통에서 면면이 이어져 온 전통이고, 그 전형이 플라톤주의입니다. 이 플라톤주의 전통에 근대적 인식주체인 코키토 에르고 숨이 새롭게 기반을 놓습니다. 인간의 인식 앞에서 바로 벌어지는 현상, 인간에게 주어지고 경험할 수 있는 현상 저 편에 초월적인 독립된 실체를 상정합니다. 그 실체는 자율적 존재로 간주됩니다. 근대적 주체들은 의식 속에 그것을 사유할 수 있고 반영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근대적 인식론의 기본 바탕입니다. 고전파 경제학도 여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근대적 니힐리즘’의 전형이죠. 이런 근대적 인식론에 기반을 둔 담론들은 현상-본체의 이원론입니다. 본체의 피안을 그리워하며 현상의 차안은 그것의 그림자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니체가 얘기하는 ‘배후에 대한 숭배’입니다. 그 현상 저편의 배후가 자율적이라고 믿는 것이지요. 스미스나 고전파 경제학이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의 작동 메커니즘은 그것 그대로 독립된 실체이어서 자기규율하는 자율적이고 객관적인 실체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그저 기술(description)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지요. 시장의 작동원리를 ‘수학’으로 그냥 받아쓰기하여 인식주관에게 투영합니다.

    근대적 인식론의 기반을 뛰어넘는, 탈근대적 기획에서 보자면 ‘보이지 않는 신’을 ‘초월적인 신’이라고 하기는 커녕 ‘내재적인 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조차 가당치 않겠지요. 그렇지만 스미스나 고전파 경제학자들이나 현대의 그 후계자들은 아직도 ‘자율적 신’으로 숭배하고 있습니다. ‘배후에 대한 숭배’, 경험적 현상 저 너머에 객관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 즉 자율적 배후를 숭배하죠.

    이러한 님의 혼동의 근원에는, 보이지 않는 손은 ‘자율적 신’이라 부당규정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오류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나와 알트크레의 논의의 맥은 서로 공유합니다. 다만 차이나는 것은 이를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사용하지 말 것인가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시용하지 말하는 이유가 무명인처럼의 혼동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나 알트크레님은 문학적으로 그것을 사용하려하였던 것이죠.

    이 단락 자체가 혼동으로 꽉 차 있습니다. 게다가 첫번째 문장은 비문입니다. ‘오류입니다’의 주어가 없어요. ‘오류가 있습니다’라고 해야 맞지 않나요? ^^ 얼마나 급하게 쓰길래… (아직 댓글 수정 기능을 설치 하지 않았으니까, 이해하겠습니다만) 그리고, 나의 혼동이 무엇이란 얘기인지, 이해 자체가 혼동이란 얘기인지, 표현이 혼동이란 얘기인지, 오류라면서 또 무엇을 서로 공유했다고 하는 것인지, 또 초래할 혼동이 무엇인지, 무명인님이 처음에는 정확한 지적을 했다 하고, 이번에는 또 혼동을 하고 있다 하는데, 명료한 정리가 필요한 단락으로 보입니다. 도강님이 보기에 이 단락이 정리된 얘기를 하고 있다고 보입니까? ^^

    무명인님의 혼동은 맥락이 다릅니다. <국부론>의 문맥을 너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혼동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지적입니다.

  21. 무명인 Says:

    도강선사/ 그걸 ‘내면’이라고 부르다니. 말도 안됩니다. 그러면 외면도 있어야 하는데 이건 7세기 복교에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익교의 복교가 성립이 될 수 없고 결과적으로는 9단계론이 무너지는데 그러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설마 8단계론을 설파하는 것은 아니겠죠? 따라서 이 경우 반드시 자율이 되어야 합니다.^^

  22. 무명인 Says:

    altcre/ 님은 내가 보기엔 귀동냥으로만 공부를 하시는 분 같습니다. 제가 혼동을 하고 있다니요. 어디서요? 전혀 텍스트를 다룰 줄 모르시는 것 같군요. 텍스트를 통한 논쟁은 님처럼 여기저기서 들은 것을 풀어놓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님이 말하는 시장조절 기능 같은 이야기를 못들어봐서 국부론 원문을 제시했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스미스의 원문이 나오면 먼저 텍스트 분석을 하고 텍스트 안에서만 이야기를 진행하는게 학문적 대화의 방식입니다. 그런 방식을 익히시기 바랍니다.

  23. 도강선사 Says:

    무명인님 ‘자율적인 신’이란 무엇인가요? 전 도모지 이 (혼동에 가득한) 조합어를 모르겠습니다. 경제학에서 보이지 않는 손, 보이는 손, 두 메타포의 차이는 먼저 전자는 경쟁을 통한 시장의 규율에 맞긴다, 그리고 시장의 규율은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 지배된다. 여기에는 자율이 들어올 여지가 없지요. 오히려 자율은 후자에서 들어오지요. 시장 참여자들이 자율적으로 조정하는 것, 시장의 부조리를 완비하는 제도적 기제를 만들어 내는 것, 특히 시장시스템의 위기 시기에 서로 협력하여 시장의 기능, 즉 자원배분의 왜곡을 조정하는 것, 시장상황의 정보독점에 따른 부당이익을 회수하는 것 등을 칭할 때 . 제 경우에는 이를 자율이라는 지칭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율적인 신이란 표현에서 신을 공제한 자율이지요. 인간의 의지를 적용하는 표현인 자율을 상정하지요.

    시장자체가 다른 카테고리, 개인 혹은 국가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의 문제는 칼폴라니에 의해, 경제 그 자체의 개념과 함께, 시장시스템의 실패와 더불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지요. 자기조절적 시스템으로써의 시장체제란, 경쟁을 통한 시장질서가 시장참여의 등록과 배제를 결정하는 조절기능이, 어느 순간 작동이 금지한다면 이를 어떻게 할것인가의 문제, 시장이 사회에 포함되는 문제 (embedded)와 연결되는 문제이지요. 시장이 사회 그자체를 포괄하는 문제로 볼것이냐, 아니면 사회 속에 시장이 국부적으로 존재하는 문제로 볼것이냐,의 문제이지요. 이 때 개인, 특히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자연적 혹은 자생적 질서(하이에크)로 만들어 졌는가의 여부, 윤리적 정치적 질서(아리스토텔레스) 혹은 자율적 질서의 문제로 만들어 졌는가의 문제에서 저는 다룹니다. 이 때 만든 시장의 상에 대한 문제는 제가 크레마티스케와 오이코노미케로 구분하였고, 이 문제를 알트크레가 콤멘트하면서, 특히 아담 스미스와 연관시켜 ‘보이지 않는 신’, 이것을 ‘자율적인 신’으로 표현하길래 제가 문제제기 한 것입니다.

    사실 알트크레의 개입은 더 혼동스럽게 만든 꼴이죠. 그 혼동의 근원에는 모호한 표현, ‘자율적인 신’과 연관된 것입니다. 애초 제 글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란 메타포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스미스가 아닌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경제에 대한 재음미를 시도하는 곳에서 알트크레의 개입은 다시 문제의식을 18세기 근대로 되돌린 꼴이 되었죠. 좌우파의 논의 이전에 경제에 대한 상을 다시 잡으려고 만든 글에, 알트크래의 호감어린 개입이 저에겐 그의 마음을 읽었지만, 제 글의 문제의식에 대한 왜곡을 드러내주는 표현이 있길래, 둘 사이의 논쟁이 시발된 것입니다.

  24. 도강선사 Says:

    알트크레/ 무영인의 정확한 지적이란, 자율과 초월을 구분한 사고 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합치되어 혼동스럽다는 표현한 말, 그것을 칭합니다. 그가 그것을 몰라 그런 말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혼동이 합치지는 계기에 대한 문제제기를 표현했기 떄문에 정확한 지적이란 뜻입니다.

    전 그 혼동의 근원을 ‘자율적 신’이란 조합어가 만들어진 것으로 봅니다. 국부론을 인용한 무명인님에게 있는 잘못이 아니라 봅니다. 오히려 텍스트로 들어가 논의를 더욱 진지하게 만든 점에 개인적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부당전제했다는 말은 무명인님이 부당전제한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신’에서 자율로 읽힐 소지를 국부론의 보이지 않는 손에서 찾는 작업, 스미스 텍스트의 보이지지 않는 손의 메타포 전체를 우선 분석하고 각각이 어떠한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를 보지 않고, 논쟁에 연관되는 것, 보이지 않는 손을 찾다보니 만들어진 부당전제입니다. 경제학의 논의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메타포를 내재적이고 초월적인 신이라고 이해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의 메타포가 초월적인 면으로도 내재적인 면으로 둘다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정착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의 매타포가 자율적인 것으로 재현”되는 주장은 경제학계에선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누누히 말씀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학에서 개념의 혼동은 논의의 일관성 상실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장의 신뢰성도 의심되지요.

    전 이만 이 토론에서 물러날까 합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가 하는 있는 연구작업과 정말 무관하기에, 그리고 이 문제의 토론이 생산적인 방향으로 접근되는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25. altcre Says:

    도강님이 토론을 맺고자 하는 얘기는 먼젓번에도 했고, 무명인님과 내가 몇 마디 더 얘기한 것에 도강님이 또 다시 끼여 들었지요. 끼여든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만 맺고 끊는 게 확실해야죠.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

    어떤 논점을 가지고 토의를 하게 되면 서로간에 자기의 얘기를 가다듬고 정교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의 문제의식을 좀더 적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얘기가 세밀하게 오고가기 마련입니다. 도강님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진행을 시키면서 상대방의 얘기는 맨처음의 상태로 무조건 되돌려 놓는 버릇이 있군요. 그 논점에 대한 내 얘기를 아무리 심화해서 얘기를 해도 듣지 않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그 다음을 얘기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님이 나한테서 들은 얘기의 전부는 단 한 마디입니다. ‘자율적 신’

    상대방의 얘기를 세밀하고 정교하게 들을 줄 아는 귀를 갖는 것이, 도강선사님이 해야 할 가장 급한 일 같군요. 아울러 아무리 댓글이라지만 최소한 하려는 말은 한번이라도 정리해본 다음에 발설하세요. ^^

    자기조절적 시스템으로써의 시장체제란, 경쟁을 통한 시장질서가 시장참여의 등록과 배제를 결정하는 조절기능이, 어느 순간 작동이 금지한다면 이를 어떻게 할것인가의 문제, 시장이 사회에 포함되는 문제 (embedded)와 연결되는 문제이지요.

    이런 대목도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인지, 단순 오타가 아니라 정리가 안 된 비문입니다. ‘시스템으로써의’의 ‘써’는 ‘서’로 고쳐야 하는데, 님은 다른 글에서도 계속 ‘써’로 쓰더군요. ^^

    님은 시종일관 경제학 타령만 하고 있으나, 나의 얘기는 애당초 문제의식 자체가 다릅니다.

  26. altcre Says:

    무명인님은, 그래도 내 블로그에 온 손님이라서, 비록 내 원칙에 어긋남에도 최대한 공손히 대접해드렸는데 신중한 예의도 보이지 않고 거침없는 공격성을 보이는군요. ^^

    나는, 익명이라도 온라인상의 자기의 지점(이를테면, 블로그나 홈피가 없다면, 이메일주소라도)을 밝히지 않는 휘발성 익명에 대해선 응대하지 않기를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런 휘발성 익명에다 대고 무슨 얘기를 하겠습니까? 그런 원칙임에도, 그래도 손님이고 오른쪽 버튼을 막아놓았는데도 원문을 갖다붙이는(불여우 쓰나 보죠?) 성의를 보여서, 대답해드렸습니다.

    무명인님은 논의의 맥락도 잡지 못하고, 미처 파악도 못하고, 자 봐라, 이게 원문이다, 하고 들이대면 그게 스칼라쉽을 보장하는 것으로 아나 본데 그런 소아병적 태도는 하루라도 빨리 버리길 바랍니다. 원문을 확인하는 것도 상황에 맞게, 논의의 맥락에 맞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내가 위의 댓글에 충분히 얘기를 했음에도, 상황을 충분히 정리해서 얘기했는데도, 모조리 다 무화시키고 맨 처음 상태로 되돌려 놓고 얘기를 하는군요. 그뿐만 아니라 고전파 경제학이 형성되어 가는 시기에 대한 개괄적 역사조차도 머리 속에 그려져 있지 않는 듯합니다.

    제가 혼동을 하고 있다니요. 어디서요?

    여깁니다. 원문을 보더라도 제대로 읽어야지요. ‘보이지 않는 손’이 국가와 개인을 매개했다고요?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국가와 개인을 매개했다고 읽는 분이 무슨 텍스트 분석을 하고 텍스트를 다루나요? 그런 기초적인 독해에도 오류를 보이는 분하고, 경제학 담론은 커녕, 나아가서는 18·19세기 지식사의 패턴을 논하겠습니까? ^^

    귀동냥으로만 공부를 하시는 분 같습니다.

    귀동냥만 들었겠습니까, 눈동냥도 들었고, 입동냥도 들었고, 책동냥도 들었고, 요즘에는 몸동냥도 듣습니다. 무명인님은 동냥이라도 듣긴 듣나요? ^^

    어떤 특정 분야를 집중해서 공부하기 전에, 텍스트북만 달달 외우지 말고, 먼저 지성사 전체에 대한 일반 교양을 쌓기 바랍니다. 그 바탕에서 원전을 읽어야 더 넓은 컨텍스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폭넓은 교양의 축적 위에서 전공의 집중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저 해당분야의 지식기능공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 기능공은 길거리에 널려 있습니다. 자기 분야를 벗어나면 잘해봐야 고등학생 수준밖에 되지 않아요. : )

  27. 도강선사 Says:

    경제적 거래 관계 혹은 교환관계란 호혜, 주고 받는 give and take, 재분배 등 3가지 차원의 공리에서 논의를 할 수 있죠. 호혜성의 원리는 주고 받고 되돌려주는 원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나오는 원리입니다. 물론 문화인류학자 모스(Mauss)에 의해 20초기에 정식화되기도 했죠. 상품 교환 관계는 18-19세기 공리주의 전통에 따라 특권화 된 것, 이것이 소위 정치경제학의 사고입니다. 재분배시스템은 축제등으로 현상되는 연대의 논리로, 시장의 실패에 나타난 문제를 보완하는 논리이지요. 케인즈적 복지제도, 구민법 등 이와 관련되는 범주 입니다. 이것은 후일 미셀 푸코에 의해 생체정치의 근거로 발전되기도 합니다. 알트크레님이 말한, 국가 /시장 간의 자율성 문제는 시장-사회의 관계문제도 포함되는 것이죠. embeddedness문제는 칼폴라니가 주장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의 자율성의 심급이 표현되는 방식에는 반드시 위상의 문제가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죠. “자율적인 신”이란 표현에서 신(god)이 들어올 수 없는 지점, 제도의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신은 메타수준의 범주이고, 자율은 혹은 재분배는 대상수준의 범주이기 때문입니다. 알트크레님은 제가 이 두 범주의 혼압을 마치 조커처럼 사용하는 것, 자의적으로 필요에 따라 어떤 때는 신(god) 없이 사용하고. 어떤 때는 자율없이 god를 사용하는 것, 더이상 토론의 여지를 봉쇄시키는 것이죠.

    제가 님과 별로 토론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는 님의 한계, 이 부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후배들에 비해 논의 수준이 현격하게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알랭 카이에가 편집장으로 하고 있는 프랑스 잡지, 모스(반공리주의 전통운동)에서 주로 이 부분이 언급되죠. 신학, 사회학, 경제학 간의 위상문제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후배 조차도 자신의 주장을 위해 한 순간에 전통적 니힐리즘과 근대적 리힐니즘을 동일시하는 분과 논의를 하지 말라고 충고하더군요. 엄밀하게 귀 기울이라는 소리는 사실 님에게 적용되어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무영인님과의 논의에 끼어 들었다고 하니 두분이서 심도있는 토론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이름을 언급하지 말고 토론하시길 바랍니다.

  28. altcre Says: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표표히, 사라지면 그만인데, 끝끝내 토를 달아요. 입 다물기 쉽지 않지요? ^^

    도강선사님은 토론의 기초조차 모르는 분입니다. 토론이라는 것은 머리 속에 쌓아놓은 지식이나 정보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토론은 문제의식과 문제의식의 충돌입니다. 토론의 과정을 통해서 서로 참조하면서 자기의 생각을 반성하고 정교히 가다듬습니다. 문제의식은 지식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지식의 축적이 반드시 의미 있는 문제의식을 보증하지는 않지요. 지식기능공들은 문제의식이 없거든요. 정보나 지식은 레퍼런스 찾아보면 누구나 접근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이와 배움에 상관없이, 문제의식만 투철하다면 초등학생과 대학자도 얼마든지 깊이 있는 토론이 가능합니다. 나는 그런 태도로 토론합니다. 도강님의 앎의 폭이 아무리 편협하고 좁아도, 섬세한 태도로 제대로 토론이 된다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습니다.

    도강선사님이 자기과시를 얼마나 하고 싶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과시를 하려면 제대로 해보세요. 도대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정리도 안된 짧은 문단 몇 개 만들면서 그렇게 비문을 쏟아내는데, 내가 어떻게 님의 사고와 지식을 넉넉하게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박사논문을 쓰나요, 책을 쓰나요? 기껏해야 몇 문단 정도 쓰는 것으로 얘기가 오고 가는 것인데도,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그것을 명료하게 말로 정리해서 상대방한테 보내야 하는데, 그것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 다 대학 초년생 때 배웁니다. 얼마나 성의가 없으면, 일단 써갈기고 한번도 안 읽어보고 올리나 봅니다?

    (도강님, 일단 워드패드나 메모장에다 쓰고 나서 확인해본 다음에 갖다 붙이세요. 오른쪽버튼이 막혀 있는 사이트에서는 그게 안 됩니다. 그러니 firefox 브라우저를 쓰세요. 그러면 오른쪽 마우스 버튼이 막혀 있어도 메뉴를 통해서 갖다 붙일 수 있습니다.)

    결국 인문사회과학은 글로써 얘기하고 글로써 의사소통을 하는데, 그 기초가 제대로 안 되어 있으니, 딱하군요. 내가 처음에 한 말 기억하나요? ‘조악한 문장엔 컨텐츠도 조악할 수밖에 없다.’ 도강선사님의 블로그에 가서 무엇을 읽어보면 문맥이 맞지 않는 문장·단락·비문이 수두룩합니다.

    알트크레님은 제가 이 두 범주의 혼압을 마치 조커처럼 사용하는 것, 자의적으로 필요에 따라 어떤 때는 신(god) 없이 사용하고. 어떤 때는 자율없이 god를 사용하는 것, 더이상 토론의 여지를 봉쇄시키는 것이죠.

    이 대목도 비문입니다. 비문을 분석해서 본래의 뜻을 복원할 만큼 나는 한가하지 않거든요. 좋은 문장도 읽을까 말까 한데. ^^

    자신의 주장을 위해 한 순간에 전통적 니힐리즘과 근대적 리힐니즘을 동일시하는 분

    나는 저런 동일시를 한 일이 없습니다. 그냥 덮어놓고, 분명치 않은 억측을 휙휙 던지는군요.

    이미 도강님이,

    이 문제에 대해선 이만 종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했으니, 이쯤해서 마무리짓도록 하지요. 나중에 혹 다른 문제 가지고 토론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명료하고 폭넓은 사고, 창발성 있는 사고, 적확한 문장을 나한테 보여주시압. : )

  29. 도강선사 Says:

    알트크레님, 나도 한마디만 추신하고 종결할까 합니다.
    맨 앞문단은 님이 저한테 질문한 것입니다. 그리고 님이 멍청하지 않다면, 님이 저에게 자율적인 신에 대한 상을 제시할 때, 간과한 부분과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언제 지식을 자랑하려고 했나요? 오히려 님이 가진 오만감이 그렇게 보였겠지요. 국내에 소개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 분야에 전문적으로 관심이 있는 사람은 님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그 내용을 깊숙히 질문하여 하지요. 수박 겉핣기 식으로 공부하고 무책임한 주장을 남발하는 님의 태도에 이젠 질렸습니다.
    한 번은 자율적 신은 우파에서 차용했다 말하고, 또 한 번은 그것을 자신의 생각을 새롭게 정리하여 문제의식을 발전시킨양 떠드는 이중적인 태도에 질려버렸습니다. 별 내용도 없고, 짜집기 실력도 정교하지 못하고, 무엇을 어떻게 정리하고 어떤 문제가 제기될 것이라는 것도 고려하지 않고, 엉성하기 짝이 없는 답변을 꾹 참고 대응해준 만으로도 전 님에게 최대한 배려를 했습니다.
    님이 제 문장을 탓하면서 대응하는 것, 그 이면은 님의 논리적 궁지를 보상하려는 심리겠지요. 제 문장 형편 없다는 것 인정합니다. 그리고 한 번 쓰고 검토하지 않고 그냥 덧글 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것이 문제에 대해 논리적 접근을 방해하지는 않지요. 불편할지는 몰라도. 님은 전통적 니힐리즘과 근대적 니힐니즘을 자율적 신으로 연결시킨다고 주장만 하였지, 어떻게 연결되는지 논증하지 않았어요. 님과 애기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 진지한 토론이 불가능하다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님의 문장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논리적 연결이 없어요. 한문적 토론은 국문법이 중요한 것이 개념어 사이의 논리적 관계가 더 중요하지요. 그리고 이를 상대에게 충분하게 납득하도록 주장해야 하는 것이고요. 그 논리적 궁지를 국문법으로 커버할 수 없지요. 그건 내 문제이고, 날 아무리 비난할 지라도, 님의 문제, 즉 논리적 궁지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위는 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님 스스로 질문해보세요. 나는 왜 스미스가 나이프니츠에게서 차용한 것을 니체에게서 도움받아 연결시키려 했나. 이런 질문도 스스로 하지 않고, 언뜻보기에 좋은 것만 끌어대는 것, 이는 님의 사고발전에 해악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우매한 사람을 현혹시킬 수 있다지만, 조금만 질문하면 금방 탈로 날것을 눈가리고 아웅하는식으로 답하지 말기바랍니다. 님은 한번도 제가 님에게 논리적으로 물어본 것을 진지하게 저에게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나하나 지적하지 않아서 그렇지, 님의 문장 하나하나 뜻어보면, 님의 주장은 대학생의 레포트용 짜집기 수준이었어요. 주마간산식으로 좋은 것을 모으지 말고, 하나하나 질문하면서 이치를 깨달고 입장을 정리해야만 논리적 질문, 궁지를 몰아주는 질문이 더 나를 즐겁게 해주는 질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이만….

  30. altcre Says:

    조금 전 댓글에서 내가 다소 따갑게 말했습니다. 여기 저기에 난무하는 비문들 때문에 하도 딱해서말입니다.

    나는 그렇게 쓰지 않습니다. 나는 포스트이든 댓글이든 다른 글이든 일단 쓰고 최소한 두어 번 정도는 소리내어 읽어보고 고치고 올립니다. 그래도 여전히 잘못이 나오고 문장이 거칩니다. 이런 문제는 사소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도 공들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게 문화의 힘이 됩니다. 국문법 문제만이 아니죠. 문학텍스트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의 기념비적인 걸작들은 다 글이 제대로 되어 있습니다.

    나도 20대후반까지는 주로 컨텐츠에 몰두했습니다. 이론이니 사상이니 지식이니 하는 것들, 말하자면 개념과 논리를 단위로 하는 것들입니다. 서른 고개쯤에서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요. 결국 모든 것은 글로 드러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창작이든 이론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정확하고 명징한 글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냥 없는 겁니다. 글로 드러나는 게 전부입니다. 말로 아무리 떠들어도, 토론에서 말로 아무리 떠들어도, 소용없어요. 글로 남지 않으면, 그냥 없는 겁니다.

    그리고, 도강님이 조금 전 댓글에서 나열한 정보들, ‘자율적 신’과 관련해서 관심이 있으면 검토해 볼 수 있겠죠. 하지만 그건 현재의 관심사가 아니거든요. 20대였을 때 집중해볼 수 있는 주제가 되겠네요. 나중에 다른 것 공부하다가 우연히 그 정보들과 만나게 되면 또 찾아보고 읽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사고와 문장이 따로 노는 게 아닙니다. 비문이 있다면 비문에 상응하는 사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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