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움
Tuesday, March 25th, 2008교육은 그렇게 사람들이 서로서로 ‘받아먹는’ 게 많게끔 만든다. 공모의 기술이다. 매체환경의 최면술도 마찬가지다. 공모를 하게끔 하고 공범자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홀로움’을 위한 저항으로서의 교육은 무교육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이반 일리히에 가까이 간다. 교육은 그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의존성을 높여 간다. 그리하여 언제부턴가 이제 내가 나인 것이 아니라, 나는 내가 관계맺고 있는 타자의 시선이 규정하는 ‘지점’이 되어간다. 나는 이제 주체가 아니라 지점이 된다. 그 지점을 향한 맹목적 질주가 주류사회의 에티켓이다. 세상에 관여하지 않기. 여기서의 세상이란 날것으로서의 인간, 그들의 세상이 아니다. 인간을 추상적 교환가치와 계량적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세상이다. 하나씩 하나씩 버려보자. 제대로 하려면 결국 근본주의가 필요하다. 모든 근본주의가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버리는 근본주의’가 필요한 것이지, ‘다 갖는’ 근본주의가 아니다. 버리는 근본주의의 목적은 ‘날것’들의 자주적 독립이다. 날것이라고 하여 문화를 벗어난 야생의 인간이 목적인 것은 아니다. ‘문화를 뛰어넘는’ 야생의 인간이라면 좋겠구나. 우리는 그런 버리는 근본주의를 권정생 선생이나 간디에서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였다지만, 니체는 사회 속에서 인간은 진짜 ‘동물’이 된다고 한다. 밧줄이라고 하지 않던가. 오히려 홀로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 실존적 깊이를 가진 ‘날것’으로서. 그러나 그 개인됨의 형식을 준 것은 ‘관계맺음’이다. 적이 이제 우군이 되어버린다. 나를 지점으로 묶어온 관계가 바람에 날려 휘발된 그 자리, 그 곳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날것도 없다. 날것이 되기 위한 해방의 에너지는 양방향으로 흐르고, 역방향을 팽팽하게 긴장시킨다. 더불어-관계맺음은 홀로움에서 비롯되며 홀로움은 더불어-관계맺음에서 파생된다. 이 둘은 서로를 먹여살리는 관계인 것이다. 이 모순이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