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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무당, 춤판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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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예전에는 전쟁이라 불렀던 일반 교역의 기지가 되었다. 단일 시장의 목적 또한 단 하나이다. 즉 시장 그 자체이다. 시장은 가능한 공간 전체로 확장을 추구한다.
시장은 목적을 달성했다.
가능한 공간은 지구 전체가 되었다.
그래서 지구 전체가 자신과의 경쟁 관계에 돌입했다. 경쟁, 확장, 이윤은 쌍방의 제한된 상태에서만 합리적이다. 규모가 더 확대되면, 증가 성향이 더 이상 어떤 적수나 경쟁 상대도 찾아내지 못하게 되는 즉시 그것은 자신을 축으로 빙빙 돌아가는 샤먼의 춤이 된다. 샤먼은 쓰러지는 순간 자신의 몸뚱이가 일으키는 먼지 더미 속에서 황홀경에 빠진다.

《떠도는 그림자들》, 116-117쪽, 파스칼 키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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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들이 저 바다 건너에서 쓰러지고들 있단다. 그들의 몸뚱이가 일으키는 먼지가 자욱하여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바야흐로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황홀경에 빠질 차례다. 이 황홀경을 눈물로 보내는 자도 있고 즐거움으로 보내는 자도 있을 것이다. 눈물로 보내는 자들에게는 또다시 무당의 춤판이 기다리겠지만 기꺼이, 즐기는 이들에게는 먼지 더미 속의 황홀경은 해방이 될 것이다.

계급은 구조가 아니라 사건이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상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하《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상·하》, E. P. 톰슨, (나종일 외, 창작과비평사, 2000)

여름 피서용으로 아주 적당한 책이다. 상·하권 모두 합쳐 1000쪽이 넘는 읽을거리가 ‘푸짐한’ 책이다.

에드워드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서구 역사학에서 신문화사적 전환의 선구였다. 동시에 사회사적 역사서술의 중요한 한 면모인 ‘아래로부터의 역사’의 한 전범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말하자면 신문화사와 사회사의 모범적인 종합적 균형이랄 수 있겠다.

프랑스 아날학파에서 시작된 구조사–사회사적 역사서술은 사회과학적 모델에 입각해서 역사서술을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당대적 사회과학적 이론과 개념틀을 가지고 역사인식을 이끌어낸다.이런 접근은 과거의 문화를 현재의 관점으로 재단하는 근본적으로 ‘독백적’인 역사서술이다. 에드워드 헬렛 카가 표현했듯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할 때의 그런 대화에는 이르지 못하는 역사서술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톰슨의 역사는 그러한 대화를 추구한다. 마치 미하일 바흐친의 대화론이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에서 분석해내는 다성악 구조에서처럼 과거의 문화 주체들이 스스로 말하게 한다. 즉 사료에 쓰여진 과거의 문화적 의미주체들이 스스로 말하게끔 역사서술이 이루진다. 현재의 문화와 과거의 문화가 동등하게 참여하여 대화를 이루는 대화공간 자체가 바로 역사서술인 것이다.

문화간의 대화는 서술의 대상이 되는 그 시대의 행위주체들의 문화적 의미체계나 가치관을 당대의 맥락에서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현재적 관점의 틀로서 과거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적 행위주체들을 그들 자신이 말하게 한다. 사료에 처리하는 태도에도 이런 접근방식이 적용된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기본적으로 산업화 초기의 영국에서 노동계급의 형성에 주목하고 있지만 그 연구방식이나 서술방식이 사회경제적 구조의 분석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그런 의존은 사회경제적 결정론에서 벗어나고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톰슨은 계급의 형성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구조화에 따라 외적 결정 조건으로 환원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그 결정 조건은 계급형성의 최소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구조적 조건에서 계급경험이 축적되고 사회적 관계의 맥락에서 긴장하고 갈등하는 동적인 과정으로서 계급의 형성을 드러내고 있다.

톰슨이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드러내고 있는 계급의 형성과정은 두 가지 계급관을 비판하는 데서 나온다. 첫번째로는 이른바 전통적 맑스주의적 계급개념인데, 이는 사실 맑스 자신이 제시한 개념이 아니라 후대에 곡해된 개념으로, 생산관계에서의 위치, 즉 생산수단과의 관계에서 구조적으로 자동결정되는 계급개념이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확립에 따라 계급의 위치와 주체성이 확보된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계급 없는 계급투쟁’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역사적 진행과정은 ‘계급 투쟁’이 계급의 형성에 선행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두번째 계급 개념으로, 우파적 관점, 즉 구조기능주의적 계급이다. 이 관점은 정태적인 계급개념으로, 역사과정의 횡단면에서 파악된 정적인 사회구조 속의 한 위치와 그에 따른 기능과 역할이라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는 역사적 과정이라는 측면, 구조에 의하여 조건지어지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주체성으로 형성해나가는 계급의 동적인 움직임을 모조리 사상해버린 역사적 스냅사진만 보여준다. 그러한 횡단면에서는 계급의 주체적 형성을 조망할 지평이 설 자리가 없다.

톰슨은 계급을 ‘역사적 현상’이자 ‘사건(happening)’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계급은 완결된 주체성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즉 사회경제적인 하부구조의 결정인에 의해서 완결된 동일성-주체성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계급은 먼저 역사적 관계의 시간적 장 속에 구조화되는 외적 조건에 반응하며 형성되어 간다. 그 과정은 동시에 계급의식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주체성의 자기정립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톰슨의 계급개념은 실체론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인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계급갈등적 관계 속에서 계급주체성은 형성된다. 이러한 형성과정은 당대의 문화적 매개물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당대의 의미·가치체계, 저항의 문화적 전통 등 문화적 의미층을 통하여 계급의식은 주조된다. 사회경제적인 구조화의 결정인은 계급경험에 대한 최소한의 방향만을 지시할 뿐이다. 계급경험을 통과하면서 주체적으로 계급의식을 만들어나가는 과정 자체가 바로 계급이 자기를 만들면서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계급은 출발이 아니라 결과인 것이다. 출발은 계급경험의 조건일 뿐이며,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계급은 결과이면서 과정이다. 톰스의 표현에 따르면, 계급은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이요, 이런 이해관계나 저런 이해관계가 아니라 여러 이해관계 사이의 마찰이요, 운동 자체, 열기, 뇌성과 같은 소음〉(하권 562쪽)이다.

두 싸움

 

어떤 싸움의 記錄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
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
아버지의 팔을 꺽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
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 신은 채
마루로 다시 기어 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
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누나와 작은누나의 비명,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와 술 냄새를 맡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 버릴 테야
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 버릴 테야
별은 안 보이고 갸웃이 열린 문 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라일락꽃처럼 반짝였다 나는 또 한번 소리 질렀다
이 동네는 法도 없는 동네냐 法도 없어 法도 그러나
나의 팔은 罪 짓기 싫어 가볍게 떨었다 근처 市場에서
바람이 비린내를 몰아왔다 門 열어 두어라 되돌아올
때까지 톡, 톡 물 듣는 소리를 지우며 아버지는 말했다

(이성복,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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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학년이던 해 가을이었다. 외갓집의 망나니였던 외삼촌이 어떤 아저씨를 데리고 우리집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 아저씨는 외삼촌의 사촌형, 그러니까 엄마 형제들의 사촌이었다. 그 작자는 언제나 술에 찌들어 살고 불량하고 거친 사람이었다고 들었다. 아직 젊어 혈기왕성한 외삼촌은 그 사촌형을 잘 본받아서 판단과 행동을 대부분 그 작자에게 의존한다고 했다. 두 사람은 그날 모종의 ‘행동’을 작심하고 찾아왔었나. 초저녁이었고 술상이 차려져 술잔들이 몇 순배 돌아갔다. 술좌석의 시끄러운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우리는 옆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한참 지나서 어른들 이야기가 험하게 오고 가면서 고함 소리가 터졌다. 술상이 뒤엎어지고 방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악쓰는 소리, 욕하는 소리가 뒤섞이고 엉망이 된 좁은 방안에서 모두 일어나 주먹다짐과 몸싸움이 벌어졌고, 곧 미닫이 창호문은 발길질에 뜯겨 쓰러지고 다들 마당으로 나뒹굴었다. 방바닥이며 마당의 시멘트바닥에는 피가 떨어졌다. 누군가 피투성이가 된 듯했다. 아버지의 이마 왼쪽에서 흐르는 피가 눈에 들어왔다. 순하던 아버지도 무척 취해서 두 사람과 일대이로 싸웠다. 마당에는 물 담아놓고 쓰던 드럼통이 있었는데, 누군가 그 나무덮개을 들고 휘두르고 집어던졌다. 엄마와 함께 그들을 말리고 있던 큰 누나가 격앙된 목소리로, 파출소 가서 순경을 불러오라고 나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맨발로 숨이 차도록 뛰었다. 큰 길가에서 늘 보았던 파출소까지 득달같이 달렸다. 들어가자마자 허겁지겁 누군가한테 외쳤다. “싸움이 났어요. 아버지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고 있어요.” 그들은 누구랑 싸우느냐고 물었고, 삼촌하고 싸운다는 내 말에 낄낄대면서 그건 집안 싸움이 아니냐고 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서로들 농담을 주고 받았다. 그렇게 한참 뜸을 들이고나서야 귀찮아 죽겠다는 듯 마지못해 둘이 일어나 모자를 쓰고 내 등을 돌려 세워 백차에 태우고,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우리집으로 향했고 나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방향을 일러주었다.

그때부터 나와 나의 형제들은 그 망나니 외삼촌을 더 이상 ‘외삼촌’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불렀으며, 술버릇 나쁜 사람을 증오했다. 동생과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그 놈이 다시 우리집에 와서 깽판을 부리면 때려죽이겠다고 오랜 세월 별렀다. 고등학생이었던 어느 날 엄마한테서 그 외삼촌의 사촌형이란 작자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고, 우리집에 얼씬도 못하던 외삼촌은 오랜 세월 알콜중독으로 외할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내가 대학생이었던 언젠가 이미 알콜중독 말기로 숯처럼 검은 얼굴을 하고 우리집에 와서는 나를 보며 오랜만이라고 웃으며 반가워했다. 알콜 때문에 숯처럼 타버린 그 얼굴을 보면서 그토록 오래 증오했던 마음은 사라졌고 그의 인생이 불쌍해졌다. 얼마 뒤에 그도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남기고 외할머니보다 먼저 죽었다. 아버지는 그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음에도 더 오래 살다가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