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in 2008/04/06 ¬ 4:04 amh.altcre
불멸
겸손은 아마 내 천성
그걸 그러나 스스로는 모르는 체
나는 항상 반쯤 드러내며 살아왔다
내가 가진 것의 반
또는 그보다도 적게.
모든 걸 아는 풀잎
모든 걸 아는 저 새들
모든 걸 아는 동물들
그리고 해와 달
만물이 항상
자기를 반쯤 드러내고 있듯이
나는 반쯤 드러내며 살고 있다
언제까지나
장차 내가 죽었을 때에도
그건 나를 반쯤 드러낸 모습일 터이니
그건 실로 죽은 게 아닐 것이다
나는 불멸이다.
(정현종, 全文)
***
열어놓은 창 밖에서 멀뚱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는 저 달도 내가 불멸임을 안단다. 밤마다 울어대는 개구리들도, 날씨가 따듯해지니 방안 구석구석에서 출몰하는 그리마들도, 부엌에서 날아다니다 파리채에 얻어맞아 죽어가는 파리도, 이틀에 한번씩 불어제끼는 골짜기 바람도, 물앵두나무 가지에서 트는 새 움도, 점심상에 올라온 뒤꼍의 나물도, 늦은 오후 허공에 떼지어 우글대는 하루살이들도, 쓰레기 태우고 바람에 날리는 재도, 오늘 다섯 통이나 떠온 샘물도, 희희낙낙하는 아이들의 얼굴도, 내가 불멸임을 안단다.
그래,
나도 안다, 내가
불멸임을.
Posted in 2008/03/28 ¬ 4:01 amh.altcre
문화로서의 사치는 ‘인간’과 ‘인간적 삶’의 디자인이자, 계속 갱신되는 발명이다. 조악한 디자인의 삶은 그 자체가 징역이요, 고도로 섬세한 디자인의 삶은 그 자체가 축복이 되겠다. 불행하게도, 그 디자인을 판별해주는 심판관을 어디에서도 만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좋은 디자인을 볼 줄 아는 안목에 이르렀다면, 그 안목 즉 섬세한 사유의 사치는 이미 그 사치 자체가 최상의 축복이다.
그리고, 그 불행과 다행이 순환하지 않으니, 이 또한 지고의 축복이 아니겠는가.
Posted in 2008/03/25 ¬ 2:09 amh.altcre
교육은 그렇게 사람들이 서로서로 ‘받아먹는’ 게 많게끔 만든다. 공모의 기술이다. 매체환경의 최면술도 마찬가지다. 공모를 하게끔 하고 공범자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홀로움’을 위한 저항으로서의 교육은 무교육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이반 일리히에 가까이 간다. 교육은 그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의존성을 높여 간다. 그리하여 언제부턴가 이제 내가 나인 것이 아니라, 나는 내가 관계맺고 있는 타자의 시선이 규정하는 ‘지점’이 되어간다. 나는 이제 주체가 아니라 지점이 된다. 그 지점을 향한 맹목적 질주가 주류사회의 에티켓이다. 세상에 관여하지 않기. 여기서의 세상이란 날것으로서의 인간, 그들의 세상이 아니다. 인간을 추상적 교환가치와 계량적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세상이다. 하나씩 하나씩 버려보자. 제대로 하려면 결국 근본주의가 필요하다. 모든 근본주의가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버리는 근본주의’가 필요한 것이지, ‘다 갖는’ 근본주의가 아니다. 버리는 근본주의의 목적은 ‘날것’들의 자주적 독립이다. 날것이라고 하여 문화를 벗어난 야생의 인간이 목적인 것은 아니다. ‘문화를 뛰어넘는’ 야생의 인간이라면 좋겠구나. 우리는 그런 버리는 근본주의를 권정생 선생이나 간디에서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였다지만, 니체는 사회 속에서 인간은 진짜 ‘동물’이 된다고 한다. 밧줄이라고 하지 않던가. 오히려 홀로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 실존적 깊이를 가진 ‘날것’으로서. 그러나 그 개인됨의 형식을 준 것은 ‘관계맺음’이다. 적이 이제 우군이 되어버린다. 나를 지점으로 묶어온 관계가 바람에 날려 휘발된 그 자리, 그 곳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날것도 없다. 날것이 되기 위한 해방의 에너지는 양방향으로 흐르고, 역방향을 팽팽하게 긴장시킨다. 더불어-관계맺음은 홀로움에서 비롯되며 홀로움은 더불어-관계맺음에서 파생된다. 이 둘은 서로를 먹여살리는 관계인 것이다. 이 모순이 눈부시다.